불안을 선택하는 용기 4화
악몽에 마침표를 찍다
직장으로의 복귀가 일주일 후로 다가왔다. 그간 복귀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고 불안했었다. 몸도 정신도 완전히 나은 상태가 아니지만 나는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아프다고 현실을 더 회피할 수는 없다. 이젠 부딪쳐야 한다. 스스로를 돌보며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일도, 가정을 돌보는 일도, 직장 일도 동시에 해야 할 때가 왔다.
앞서 상담해 주신 ‘보내는 족족’ 심리상담사님과 약 한 달 동안 내 삶을 차근차근 점검해 나갔다.
“다시 돌아갔을 때 제일 걱정되는 것이 무엇인가요?”
“제가 아프기 전처럼, 제 일상을 꽉 채워버려서 돌발상황 한 방울에 넘쳐버리는 것이요.”
“그렇게 일상을 채우려 한 이유가 있나요?”
“평소 허둥대는 캐릭터이지만 제가 잘하는 분야를 할 때는 굉장히 멋진 사람이 돼요. 학교에서는 후배 교사에게 도움을 주는 멋진 선배 교사가 되고 싶었어요. 교회에서는 팀원들 실력이 좋아 제가 연습해서 수준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그리고 잘 해내서 스스로 발전하면 기쁘고 재미있고 뿌듯해서요.”
“잘 해내지 못하면 어떤 감정이 드나요?”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잘하려고 끝없이 준비하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학교에 다시 돌아가려면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할까요?”
“알림장 쓰기나 수업 준비하는 것을 내려놓아야겠어요. 교회 피아노도 복귀하게 되면 연습은 안 해야 할 것 같아요.”
“준비나 연습을 안 하게 되면, 수업이든 피아노든 예전에 준비했을 때와 분명 차이가 생길 거예요. 아이들의 반응도, 학부모의 반응도 달라지고 피아노를 치는 민아 씨도 연주를 듣는 사람들도 다 느낄 거예요. 이 차이는 어떻게 채우실 건가요?”
“차이는 채울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이젠 비워내야 하는데, 채우려면 다른 무언가를 더 해야 할 것 같거든요.”
“네, 차이가 나겠지만 그게 꼭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 안 하셔도 되어요. 공백이 생겨도 괜찮아요. 설사 내가 무언가를 못하더라도 괜찮은 겁니다. 애초에 그게 자신이 못해서 생긴 차이가 아닐 수도 있어요. 스스로를 괜찮다고 그대로 인정해 주세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을 심리상담사 선생님을 통해 깨달았다. 잘할 때와 못할 때의 차이를 느끼는 것이 불안했다. 그래서 불안을 피하는 쪽으로 잘못 살고 있었다. 준비하든 준비하지 않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면 좋겠다. 그러면 그 차이에 익숙해지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래서 서서히 불안에 나를 노출시키기로 결심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풍문으로는, 사람이 자기 역량을 키우려면 가보지 않은 길로 가봐야 한단다. 그간 불안을 피하는 쪽으로 살아왔으니 이젠 불안한 쪽으로 선택해서 나아가 보기로 했다. 전날 긴장되어 잠을 못 자는 것이 두려워 쉬고 있던 교회 피아노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직장 복귀와 병원 진료, 상담까지 소화하면서 교회 피아노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잘됐다는 마음으로 스스로 더 불안하도록 학교 복귀와 동시에 피아노도 재개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유튜브를 돌아다니며 최선의 연구를 하느라 나를 갈아 넣던 패턴을 깨기 위해 연습은 절대 하지 않고 실전에서 바로 연주하기로 마음먹었다. 틀릴까 불안해도 그냥 치기로 했다. 틀리면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성공하면 쾌재를 부르기로 했다. 그런데 피아노 복귀를 하루 앞두고 갑자기 새끼손가락이 아팠다. 손가락을 구부릴 때마다 고통이 극심하여 손을 피아노에 올릴 수가 없었다. 이제 막 복귀한다고 했는데 손가락 때문에 민폐를 끼치고 팀을 혼란스럽게 할까 불안했다. 그래서 차라리 피아노를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새끼손가락을 붕대로 묶어 펴놓은 다음 건반 연주를 마쳤다. 손은 아팠어도 마음은 뜨거웠다. 나의 욕구는 피아노를 계속 치는 것인데, 민폐를 줄까 두려워 욕구와 반대되는 선택을 하려 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은 살짝 무시하고 그만두겠다는 말은 접기로 했다. 아파서 못하게 되면 팀에 그때마다 다시 말씀드리려 한다. 그 정도는 이해해주고 받아줄 품 넓은 팀이라는 것을 알기에 감사하다.
그렇게 직장에 복귀하게 되었다. 열몇 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품에 안겼다. 오랜만에 오니 정신이 멍했다. 오히려 멍하니까 불안하거나 성급하게 일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알림장은 전달사항이 있을 때만 쓰기로 했다. 수업 준비는 이미 1년 치를 해놓은 것들이 쌓여있어서 그때그때 쓸 것을 당일 아침에 인쇄하기로 했다. 준비를 넘치게 해 놓고도 오후마다 더 좋은 자료가 있을지 찾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았다. 알림장을 매일 올리지 않으면 학부모님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이 올라왔지만 그 걱정도 참기로 했다. 다행히도 나 대신 우리 반에 오셨던 선생님께서 전달사항이 있을 때만 알림장을 올리셨던지라 학부모님들도 적응이 된 듯했다. 더 일하고 싶은 마음도 참으며 제시간에 나가기 위해 애썼다. 퇴근 시간을 넘기지 않고도 일을 제때 끝낼 수 있게 되었다. 일상을 비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교실을 뛰쳐나가던 아이가 많이 안정되었다. 3월 초반부터 매일같이 학부모님께 상담을 의뢰하고 적극적으로 말씀드렸던 것이 이제 효과가 있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아이들의 큰 말썽도 없고, 내가 긴장할 일도 없다. 아이들도 그 새 더 자라 아침이면 의자에 잘 앉아있고 자기 자리 청소도 깨끗이 잘했다. 복귀한 지 2주째 되던 날, 자투리 시간에 아이들과 동요 ‘꽃게 우정’을 부르다 울컥 눈물이 났다. 아이들의 덕지덕지한 볼살과 보송보송한 솜털이 보였다. 내가 알던 아이들이 이렇게 귀엽고 예쁜 아이들이었나. 고운 목소리로 천진하고 평화롭게 노래하는 아이들 한 명 한 명 얼굴에서 빛이 났다. 마스크를 쓴 얼굴 위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살금살금 천천히 급한 마음 버리고 나란히 걷는 마음, 꽃게 마음.” 흔들리는 음정으로 환히 웃으며 함께 노래했다.
다시 고등학교에 왔다. 아침 등굣길, 교복을 입고 교문으로 들어가는 수많은 학생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또다시 수능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방을 메고 학생들을 따라 학교로 들어가던 도중 내가 누군지 생각이 났다. 뒤돌아 나오며 크게 소리쳤다.
“나는 이 시험을 볼 필요가 없어. 이제 수능은 끝낼 거야!”
직장으로의 복귀 3일 전, 그렇게 나는 20년간 꿔 오던 내 인생의 악몽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젠 불안을 선택하는 용기로, 불안과 함께 살 것이다. 선택의 순간마다 불안을 피하지 않고 진정 원하는 방향대로 솔직하게 결정할 것이다. 마흔을 앞두고 인생의 전반기를 돌아보며, 새롭게 만들어나갈 후반기의 자유로운 삶을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