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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나무 Oct 26. 2023

산꼭대기 위의 집 6화

고추 재배 이야기

  배수지 시절, 고추는 내게 지긋지긋함이었다. 좋은 기억도 있겠지만 일단 할 일이 많아 지겨워졌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집에서 어른들의 심부름을 꽤 많이 하면서도 싫다는 내색을 할 수 없었다. 같이 비닐 들고 움직이기, 모종에 비료 주기, 고추 지지대 묶어주기 등의 농사 심부름도 마찬가지였다. 여름이 되면 고추 수확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크기가 커진 풋고추를 골라 땄다. 하얗고 작은 꽃이 있던 자리에 생겨난 열매는 금방금방 자라났다. 크기가 충분히 큰 고추를 30분이 넘도록 땀을 뻘뻘 흘리며 따면, 며칠 뒤 같은 일을 또 반복했다. 날씨가 바뀌는 동안 고추의 색깔도 변해 갔다. 초록색에서 갈색으로, 갈색에서 빨간색으로. 이 세상에 고추는 초록색과 빨간색, 이렇게 두 종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중간 단계 갈색 고추를 정말 많이 보았다. 초록색과 갈색이 이어진 고추, 갈색과 빨간색이 이어진 고추, 심지어 초록색-갈색-빨간색이 연속으로 그러데이션을 이루는 고추도 많았다. 가끔 특이한 모양의 고추도 있었다. 한쪽으로 뒤틀려 있거나 뭉툭한 것, 조금 구겨진 것들도 있었다. 나중엔 색깔이며 모양은 중요하지 않았다. 제발 벌레만 없기를 바랄 뿐. 벌레 먹은 고추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열심히 따다가 벌레를 만나기도 했다. 가끔은 상한 고추도 있어 만졌을 때 물컹한 느낌이 들면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계속 고추 수확을 하다 보니 재미있는 점도 있었다. 하얀 꽃이 떨어지지 않아 작은 고추에 꽃이 껴 있을 때가 있었다. 보통은 고추 위쪽에 껴 있는데 하루는 꽃 한쪽이 비스듬히 2cm가량의 작은 고추 중간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머리부터 몸통까지 새하얀 팬티를 비뚤게 걸친 아기 같아 귀여움에 혼자 폭소를 터뜨리고는 했다. 고추를 색깔별로 다 따고는 혼자서 분류하기 놀이도 자주 했다. 익은 순서대로 단계를 매겨 바닥에 늘어놓곤 했는데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손녀의 놀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추를 모두 걷어가 버렸다. 고추가 매워 생으로 먹지는 않았어도, 가끔 할머니께서 해 주시는 고춧잎무침은 맛있게 먹었다.


  가을에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홍고추를 말렸다. 큰 돗자리 여러 개에 고추를 겹치지 않도록 펼쳐놓고 마당 여기저기에 두었다. 갑자기 비라도 내리면 부랴부랴 고추 돗자리를 집 안으로 들여놓아야 했다. 비가 종일 내리는 날에는 말리던 고추가 상할까 봐 집에 보일러를 틀어서 고추를 뜨끈하게 말리기도 했다. 고추가 바삭하게 마르면 할머니와 집 바닥에 앉아 한 시간이 넘도록 꼭지를 따고, 가위로 고추를 길게 갈라 씨를 뺐다. 씨 따로, 빨간 과육 따로 모아서 포대나 봉투에 담아 삼촌들과 할머니가 방앗간에서 가루로 빻아 왔다. 과육은 조금 남겨두었다가 가는 실처럼 오려서 실고추를 만들었다. 실고추는 각종 요리를 할 때 예쁜 색과 모양을 내기 좋은 재료였다. 여기까지도 할 일이 많지만 한 해 고추 농사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날이 쌀쌀해지면 진짜 힘든 노동이 시작되었다. 바로 고춧대 뽑는 일이다. 다음 해 농사를 위해서는 고춧대를 다 뽑아야 한다. 고춧대에 묶어둔 지지대 끈을 자르고, 지지대도 뽑고, 고춧대도 뽑아야 하는데, 봄부터 한참 시간이 지나 단단해진 땅에 박힌 줄기를 뿌리째 뽑는 것이 열 살인 내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집에서부터 닭장 앞까지 길게 두 줄로 있던 고춧대를 할아버지와 함께 일일이 다 뽑았다. 차가워진 손으로 낑낑대며 고춧대를 뽑으면서도 하기 싫다고 툴툴댈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배수지 관사에 2년 정도 사는 동안 똑같은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듬해에 그대로 반복했다. 두 번째 해에 고춧대 뽑으면서는 지겨움과 원망이 몰려왔다. 고춧대를 그대로 두었다가 다음 해에 고추만 또 수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실제 열대지방에서 고추가 여러해살이로 크게 자란다는 이야기를 어른이 되어 접했다. 어린 시절 일하기 싫어 상상만 했던 것이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니 흥미로웠다. 2년 뒤 배수지 관사에서 이사를 나와서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이제 고춧대를 뽑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지긋지긋한 고춧대여,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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