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은 유난히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교인이 아닌 사람을 손에 꼽는 게 더 빠른 편이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던 무렵, 등원을 시키고 돌아서는 길에 한 분이 유난히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학부모라며, 첫인사에 내 전화번호까지 묻고서 자신의 이름을 남겨주었다.
"이지나. 010-XXXX-XXXX"
뒤돌아서며 건네는 말은, "이 어린이집엔 교회 다니시는 분이 많더라고요. 저도 막 두 분이랑 친해졌는데, 다음에 한번 커피라도 같이 마셔요." 인사치레 같은 말이라 생각했다. 첫 만남에 아무렇지 않게 내 핸드폰 번호를 내줘야 했던 불편한 마음을 한편에 두고, 어차피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엄마라면 오래 볼 사이니 건네지 않기도 어려운 일이었던 거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연이어 다음날 등원 길에 또 다른 엄마가 말을 건넨다. 지나 씨에게 전해 들었다며 커피 한잔 마시자며, 이미 커피숍에 기다리고 있는 분이 있다고. 어린이집은 아이의 첫 기관 생활이었지만, 나에게도 엄마세계에 들어가는 첫 사회생활이었다. 이제야 생각하면 서로가 익숙해 진 뒤에 함께 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커피를 마시자고 하면 선뜻 응해야 하는 게 당연지사인 줄 알았다.
이미 두 분은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보내다 함께 지금의 어린이집으로 아이를 옮겼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육아 동지라도 만난 마냥, 이제까지 아이를 키우며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꺼내놓았다. 내가 노력했던 일들, 읽었던 책들, 이야기가 어느새 자신들도 이미 육아 공부를 교회 모임에서 하고 있다며 교회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나로서는 불편하고 어색한 이야기들이 오갔고, 마지막엔 조금 이상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느낌 마저 들었다.
두 사람은 공동육아에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고, 어런이집에 재원 하는 학부모들의 종교와 원장님의 종교도 이미 다 파악한 상태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일주일이 흐르고 나서 아이의 등원길 아침부터 장문의 카톡이 와있었다. 자기네 교회에 매주 수요일 부모 교육을 하고 있는데, 아이를 등원시키고 9시 30분까지 나를 어린이집 앞에 데리러 오겠다는 것이다. 내가 운전을 못하니 본인이 직접 운전을 해서 어린이집에서 30분이나 떨어진 곳의 교회를 데려가겠다는 것이었다. 의사를 묻는 게 아니라 통보식의 뜬금없으면서 무례하고 불쾌한 문자였다. 코로나 시절 신천지에 대한 경계심마저 높아져 있던 터라 신천지 종교에 대한 포교를 의심했을 정도였다. 남편을 방패 삼아 거절하고서는 일 년은 인사도 제대로 주고받지 않았다.
처음 만나 전화번호를 쉽게 건네준 지나 씨와 커피를 마셨던 두 사람, 이 세 사람은 같은 교회를 다녔고 내 번호를 자연스럽게 내 의사와 상관없이 그 셋은 공유하고 있었다. 어린이집 엄마들을 대상으로 자연스럽게 그 셋은 한 무리를 지어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고, 신실한 기독교 신자 일 수록 오랜 시간을 들여 관계를 맺으며 다니고 있는 교회 대신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다닐 것을 끊임없이 이야기했었다.
새벽기도를 나가야 해서 새벽 3시 아직 세 돌도 안된 아이들을 집에 놓아두고 기도를 하러 갔다 오는 엄마, 졸업여행을 다녀와서 쉬고 싶은 아이를 데리고서 밤에 기도 하러 가는 엄마. 그 아이는 공공연하게 어린이집을 오면 나는 오늘도 교회에 끌러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엄마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살피시기에 게을리할 수 없는 종교활동이지만, 아이는 힘들어했다. 그리고 그 엄마의 모든 생활에는 교회가 있었다. 아이의 학원 상담, 교육 상담도 교회 목사의 부인인 사모님의 조언을 따르며 모든 삶의 계획을 세워나갔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모님을 믿고 따르는 이상한 교회. 우리 아이는 교회아이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가끔은 세상이 만들어진 이유와 나는 죄인이라는 찬송가를 무슨 뜻인지도 모르며 재잘대는 아이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때 나는 예민한 아이가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 적응한다는 게 무서웠다. 아이의 두려움만큼이나 나의 두려움 또한 컸다. 지나고 보니 아쉬움이 남는 선택들이었지만, 아쉬움이 전부였던 세월은 아니었으니. 그리고 또 한 번 선택의 기회가 내게 있다면 그땐 아이를 믿고, 환경을 바꿔주리라는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 둔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졸업한 후, 처음 나에게 말을 걸었던 지나씨는 이미 그 교회에서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다. 교회사모라는 사람은 너는 인생 왜 그렇게 거지같이 사냐는 둥 하나님을 빗대어가며 사람들에게 막말을 하고, 네가 니 자식 망치고 있다며 그 사람을 한없이 바닥으로 내 몰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나 씨는 그 교회를 벗어나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했다. 자신이 그곳을 나가서 자식 망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신과를 찾아 우울증 약을 먹을 생각을 하면서도 그 원인을 제공하는 곳을 벗어날 생각은 엄두에 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교회를 신실하게 믿었던 사람들은 원의 원장님 마저 찬양하고 받들었다. 발도르프라는 어린이집 철학을 빗대어 이상적 관념적인 교리와 비슷한 이념으로, 교리를 전파하는 목사와 사모를 찬양하듯, 원장님도 찬양했다. 그 교회의 이상한 사모와 원장님의 모습은 이상하리만큼 닮은 구석이 많았다.
요즘 유행하는 각종육아서를 섭렵해서 유명한 저자의 말을 빗대어 이렇게 아이를 키워야 하는데, 엄마가 잘못해서 자식이 잘못되고 있다고, 불안하지도 않은 아이를 끊임없이 엄마 탓으로 몰아가며 내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어린이집의 생활에 아이가 불안해하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냐고 시시때때로 호출을 했다. 가정부 도우미를 두고, 살림을 하던 원장님은 요즘 부모들은 걸래와 행주의 차이를 모르는 세대라며 나무랐다. 자신은 김장한번 해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며 각종 계절마다 아이들의 음식을 직접 집에서 장을 담그라는 조언을 비롯해서 김장 때면 어김없이 엄마들을 호출해서 무와 배추를 나르고 재료를 다듬에 김장을 이틀에 걸쳐하는 행사를 열었다. 자신은 김장을 해본 적이 없어 액젓과 고춧가루를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모른다며 웃으며 말하고선 학부모에게 각종 재료를 건넨다. 아이에게 시선을 거두라며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은 과거 교직 생활을 하면서 결혼 전까지 자신의 손으로 옷 한번 사본적 없고 엄마가 사주는 옷을 입고서, 아파서 결근해야 하는 날도 엄마 손을 빌려 직장에 전화를 했던 교사였다는 게 놀라웠다. 요즘 직장에 엄마들이 자식 아프다며 결근 전화를 하는 것에 아연실색하던 우리 이야기를 듣고서, 자신의 엄마도 그러했으니, 그건 엄마 성향으로 받아 들어야 하는 것이라며 요즘 부모들을 나무라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서 모여있는 학부모들에게 아이들의 발달과 대근육 소근육 발달을 위한 세심한 교육방법과 절차와 각종 책들을 안내했다.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들을 말하는데 자신은 언제나 전문가이니 자기 말을 믿고 따르는 자가 열린 귀를 가지고 있고 자식을 올바로 키울 수 있다며 늘 독서모임과 공동육아상담을 통해 수시로 불러 모아 자신이 생각을 전파했다.
그중 가장 그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언니 격인 아줌마는 아이를 방치하다 못해 관심밖이었다. 한창 또래와 어울리고 싶어 했던 아이는 엄마 손에 이끌려 점심만 먹고 교회 사모님의 딸이 하는 피아노 교습소에서 강제적인 피아노를 배워야 했다. 파이노를 배우면서 사모의 딸에게 영적인 기운을 받는 것 마냥 정신트레이닝을 시켜야 한다고 하며 친구들과 놀고 싶은 아이를 억지로 끌어내 피아노 교습소로 데리고 갔다. 아이가 놀이터에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소리 지르는 이유를 절실한 신도였던 그 엄마는 모르는 듯했다. 자신만 매번 놀이에서 빠져야 하고, 점점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해 소외되어 아이의 모습은 보지 못하는 엄마. 그 엄마는 원장님을 찬양했다. 교육관을 찬양하고 모든 행사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모양새를 띄어도 그만한 철학을 가진 분이 없다며 신봉했다.
어린이집의 회계는 그 당시 매우 불투명했고, 원장님은 원에 머무르는 시간이 없었으며, 자신이 받고 싶은 교육을 받으러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교육을 받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지적 욕구를 채우러 다니시는 분이었다.
모든 게 떠나고 보니 더 이상했던 어린이집. 교회를 다니는 절실한 신도가 없었던 한 살 밑에 아이들 반은 진작에 이 어린이집을 모두 떠났었다. 한 번에. 그들이 떠나고 나서 남긴 말들이 모두 맞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