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구슬 같은 아이라 정말 최선을 다해 키웠는데, 잠시 숨 쉴 틈이 생겼다고 생각했던 순간, 왜 탁 하고 깨져버리는 걸까요."
" 수하 엄마, 애들 어린이집 보내고 나랑 같이 놀자. 나랑 같이 놀면 되지, 우리 배우고 싶은 것도 배우고, 울지 마 다 지나가. 그때 그 순간은 그게 전부인 것 같은데, 지나가더라."
어린이집 하원 후, 아파트 단지 호숫가에 아이들은 해맑게 놀고 있고, 채율이 엄마의 위로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아이의 틱이 처음 발현되고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나서, 나도 모르게 하소연하다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그날도 원장님은 조언할 얘기가 있다며 나를 불렀다.
내가 너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 키우니 아이가 엄마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틱이 발현되었다고, 일을 하러 나가라는 조언에 멘탈이 무너졌다.
나는 아이를 낳고 사회생활을 포기했던 마음을 억지로 욱여넣고 있었는데, 일을 안하고 싶어서 안하는게 아니라 밤낮 바뀐 남편의 자영업으로 인해 내가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남의 집 사정도 모르고 대뜸 일을 안 하는 엄마의 부담스러운 시선 탓으로 돌리다니. 지난밤 자기를 믿고 어린이집을 보내달라던 그 원장님의 문자는 무슨 의미로 보낸 건지. 왜 틈만 나면 나를 불러 너 때문에 아이가 잘못되고 있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는 건지.
어린이집에 갓 입소했던 4살 때, 아이는 생존에 필요한 말이 아니고선 거의 하지 않고 다니던 시절,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고마운 친구가 있었다. 채율이었다. 채율이 엄마는 이미 첫째를 키우고, 둘째를 우리 아이와 함께 어린이집을 보내고 있었다. 예민하고 섬세했던 첫째를 키우면서 어려웠던 과정들을 나누어 주며 힘들어하는 내게 기꺼이 곁을 내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아이의 틱이 발현되고 나서 유일하게 솔직하게 나의 어려움을 나눌 수 있었던 분이었다.
감사하게도 우리 아이는 틱이 발현되어도, 채율이네는 기꺼이 우리 아이가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한 살 아래 동생반 아이들과 채율이네와 그렇게 점점 더 가까워지고 우리 아이의 어려움도 기꺼이 함께 포용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아이의 6살은 어린이집 밖에서 추억을 쌓아갈 수 있었다. 이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방황하던 우리 가족은 어려운 시절은 무사히 잘 지나갈 수 있었다. 집에 불러 따뜻한 밥 한 끼 내어주던 그 마음,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2년 전 11월 22일. 아이의 틱을 내 눈으로 확인 한 날. 기억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시간이 한참이 지나도 그날의 그 모습들은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아이의 틱이 발견되었던 그 해 가을은 여전히 코로나로 인해 실내에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던 날들이었다. 종업식 때 선보일 작품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아이들은 가을부터 놀지도 못하고 연신 바느질로 수공예품을 만드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발도르프 원이라 수공예품을 일정 가짓수 이상 만들어야 하는데, 1학기에는 남자아이들이 따라오지 못해 1년치 분량을 2학기에 몰아서 만들어내고 있던 차였다. 학부모 상담 때, 담임선생님으로 부터 아이가 수공예품 만드는 때 입을 실룩인다고 이야기를 듣기는 했었다. 왼손 잡이인 아이가 오른손으로 시범을 보여주는 선생님을 보며 어렵게 수공예품 만들기를 따라가고 있는 터라 입을 꾹 다물고 눈물을 참는 모습으로 생각했었다. 그때 당시 아이는 어린이집 가기 싫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었다. 시간이 지나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당시 원에서는 아이에게 오른손을 쓸 것을 지속적으로 강요하고 있었다. 두돌이 되던 시점부터 아이가 왼손잡이임을 직감하고 있었는데, 어린이집에서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원장님의 끊임없는 지시로 아이는 오른손 쓰기를 강요당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수공예품 만들기 뿐만 아니라 수저 사용도 왼손으로 할 때마다 이름이 불리고 지적을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원장님은 학부모 단체 상담 시간에 대 놓고서 오른손을 쓰도록 부모가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왼손을 쓰는 아이들이 수학을 못한다고 이야기해야 부모들이 그제야 알아듣는다며, 왼손잡이를 오른손 잡이로 고쳐주지 않는 건 부모가 아이를 불편한 세상 속에 살아가도록 방치하는 일이라고 끊임없이 얘기하셨다. 잘못하거나 실수한 일이 없는데도 왼손을 쓸 때면 아이의 이름이 늘 불리고 지적당하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틱을 수공예품 시간마다 확인하고 있었지만, 집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모습이었기에 나는 인지하지 못했었다. 아이는 눈 깜빡임으로 시작해서 음성 틱까지 급속도로 하루 사이에 다른 아이가 되어있었다. 눈을 쉴 새 없이 깜빡이고 입에서는 다양한 소리를 내며 입을 끊임없이 움직였다. 소리를 내야 해서 밥을 먹는 것조차 쉽지 않았었다. 원을 잠시 쉬려고 했었는데 의중을 알아차리신 건지 원장님은 밤늦은 시각까지 나에게 문자를 보내셨다. 아이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 상황에 직면하게 해야지 부모가 물러서면 안 된다는 식의 말투였다. 처음 엄마로 살아가며 혹시 내가 아이를 그르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때였으니, 타인의 조언을 외면 할 수 없었다. 그러고선 꾸역꾸역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고, 다른 엄마들이 알아챌세라 가장 먼저 하원을 시켰다. 아이의 틱은 온몸을 다 돌고 있었다. 제발 소리만은 없어지길 간절히 빌고 빌었던 날들이었다. 아이가 잠을 자는 순간에도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틱인지 더 이상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것인가 싶었다. 그때 당시 아이는 수면도 깊지 못해서 아이가 일어나 앉아 있다가 자기도 했고 침대와 바닥을 오가며 자기도 했다. 몸져 누은 나를 대신해 아이를 남편이 등원시켜 주던 날, 원장님은 남편을 불러 두 시간을 이야기를 했다. 부모가 아이만 바라봐서 아이가 그렇다는 식으로, 아이에게 시선을 거두라고. 그래야 아이가 자유를 느낄 수 있다며 훈계 아닌 훈계를 했다. 우리 부부는 그때 당시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그 말 하나하나를 헤아려 보려 노력했다. 그리고 원에서는 아이에게 수공예품을 빨리 만들라고 독촉하는 일을 줄이고, 오른손을 쓰라는 말을 안하고 있다고 담임선생님을 통해서 들었다.
과연 내 탓이었을까. 내 양육의 문제였을까.
눈을 깜빡이고, 소리를 내고 발목을 쓸고 다니던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적응에 어려움에 있을까 노심초사했었다. 걱정과 우려와 달리 아이는 누구보다 잘 지내고 있다. 그리고서 이야기한다.
"엄마, 우리 반에는 왼손잡이가 5명이나 있어!."
"엄마, 그때 어린이집 다닐 때 이호가 왼손으로 그림 그린다고 혼나서 이호 울었었어."
17명 중 우리 아이와 이호 그렇게 두 명만이 왼손잡이였다. 이호의 엄마는 원장님께 왼손을 쓰면 밥상머리 교육도 못 받은 거라 생각한다는 이야기까지도 들었다고 한다. 왼손잡이,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