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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완느 Sep 26. 2024

어린이집 적응 못하는 아이

20대때부터 아동 관련일을 하고 싶어 놀이치료 과정도 수료하고 이런 저런 관심을 두고 대학원 진학도 하고 싶었지만, 육아와 남편의 자영업 전환으로 이도저도 못하게 되어 전업주부로 눌러앉았으나.. 내가 봐온 아이들에 대해 기록 해두고 싶고 내 생각을 남겨두면 차후에 다시 학업으로 전환해서 아이들을 살펴볼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기록으로 생각들을 남겨본다.


우리집 아이 같은 경우에는 주 양육자였던 내가 불안도가 높았기에 아이도 불안이 높고 완벽함을 추구하는 성향에 감각이 예민한편이다. 그래서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 사람에 대한 적응의 시간이 매우매우 오래 걸린다. 어린이집 교실의 문턱 하나 넘는데 2개월, 말안하고 1년을 다니고나서, 지금은 가장 명랑한 아이로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다니고 있다. 1년간의 노력과 과정이 있었지만 그 이야기는 언젠가 자세히 기록하기로 하고..


내가 봐왔던 아이들의 경우, 가장 어린이집에 적응을 힘들어 하는 아이는 가장 친절한 엄마를 둔 아이 이다.


어런이집에 한 친구가 입소를 했다. 4살 겨울 무렵이었다. 그 아이는 컵에 물을 마셔 본 경험이 없어 물을 마시지 못했다.


집에서는 엄마가 늘 빨대컵에 물을 담아 주었던 터라, 아이는 어린이집에 와서 컵에 물을 마셔야 하는데 빨대가 없어 당황했고, 모든 친구들이 컵에 물을 마시는데 자신은 하지 못해 또 당황했고, 선생님이 더 당황하는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 보았기에 아이는 더 당황했을 터이다.


이 친구는 늘 잘하고 싶은 마음이 무척 강한 친구였다. 아이는 애살이 있고 욕심도 있고 해보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너무 친절한 엄마를 두었다. 엄마는 아이에게만은  세상 누구보다도 친절하고 따뜻하고 배려심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아이가 잠들고 싶어하는 시간에 잠들었고, 일어나고 싶어하는 시간에 일어나게 하다 보니 기관을 다니려면 늘 아침은 엄마가 먹여주어야 했다. 저녁에도 아이가 먹기 싫어하면 친절하게 어디든 아이의 곁으로 가서 먹여주다보니 숟가락질과 포크질을 친구들 만큼 잘 능숙하게 잘 하지 못하는 아이가 되버린 것이다. 어린이집에가면 스스로 아이들은 밥을 먹는데, 이 아이는 잘하고 싶지만 자기가 먹으면 다 흘리고 먹게 되는 것이다. 국을 먹다가 옷이젖든, 국수를 간식으로 먹으면 줄줄 흐르고 컵으로 물을 마시는 것도 익숙하지 않고 모든게 어렵게만 느껴진 것이다. 잘하고 싶은데 잘 안되다 보니 이 아이는 점심시간마다 돌아다니는 아이가 된 것이다. 밥을 먹고 싶지 않은게 아니라, 친구들 처럼 할 수 없어서 잘 못하는 모습을 더이상 보여주기가 싫은건데, 악순환으로 선생님도 정해진 시간 내에 아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독려해줘야하다 보니, 결국 집에서 엄마와 같이 아이 밥을 먹여주게 되는거다. 그러다 보니 이 아이는 포크질 숟가락질을 여전히 잘 못하고, 정해진 시간내에 밥을 스스로 앉아서 먹는것도 배우지 못하고, 자신이 반찬을 선택해서 먹어보지도 못하게 되는것이다.


코로나 시국에는 엄마는 아이를 안전한 곳에 머무르게 하려다 보니,  아이는 자연스럽게 집안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어린이집 아이들은 왠만해서 나라가 제한하지 않는 한 늘 산책을 한시간 반정도는 하고 있고, 아이들은 스스로 뛰거나 걷거나 선택해서 자신의 신체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활동을 꾸준히 해왔지만, 코로나에 민감한 엄마는 아이의 신체를 야외에서 마음껏 쓸 수 있는 것보다 집안에서 코로나를 피하는 안전을 택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친구들과 산책을 가면서 걷다가도 넘어져 골절이 일어났다.


눈이 오면 눈이 오는 것을 밟아보고, 그 눈이 얼게 되면 투명하게 비치는 미끈거리게 되는 곳이 얼음이라는 것도 인지하게 되고, 그곳에서 살짝 미끄러져도 신체 균형을 잡고, 이런것이 아이들의 활동 반경과 기회에 따라 천차 만별인 것이다. 어떤 아이들은 뛰어가도 안넘어 지지만, 외부 활동이 제한된 아이는 걸어가다가도 넘어져 크게 다치는 것이다.


(우리 아이의 경우에도 작년 코로나가 유행할 초창기에 외부활동을 극히 제한하고 집에 갇혀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산책갈때 유독 많이 넘어졌다. 아이는 실수하는걸 극도로 싫어하는 터인데, 넘어지게 되서 아픈 것 보다 속상하고 부끄럽다는 마음이 더 많이 들었고,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시선을 싫어했다. 아마 그 아이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된다.)


친절한 엄마의 경우에는 아이가 어지르는 장난감을 정해진 시간들이 되면 제자리에 정리하는 것도 스스로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데, 집에서는 자율성을 중시하다 보니 아이가 놀고 싶을때까지 늘어놓고 놀게 하다가 하루가 질 무렵 자기전에 한번, 정리를 엄마가 대신 해준다. 그래서 어린이집에서는 아이가 정리를 왜 해야하는지를 알지 못해, 다른 친구들이 놀이 시간에서 다른 시간으로 전환될때 정리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친구들이 정리해둔 물건을 다시 꺼내오다 보니 이 아이는 다른친구들이 생각하기에 정리하는데 방해하는 아이가 되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가 다른 친구들의 인식속에 쌓이다 보면 이 아이는 놀이에 참여하는게 쉽지 않다. 다른 아이들 입장에서는 이 친구는 밥먹는시간에 매번 돌아다니고, 놀잇감을 흐트려놓고 다 같이 정리하는 시간에 늘 정리하지 않는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친절한 엄마는 아침 저녁 양치도 대신 해주고 샤워를 할때 아이가 스스로 씻는 기회를 주기보다는 자상하고 친절하게 다 씻겨 준다.그리고 스스로 옷을 골라 입고 로션을 챙겨 바르기보다는 엄마가 옷을 골라주고, 옷을 입혀주고 신발도 친절하게 신겨준다. 하다 못해 과자봉지도 엄마가 미리 다 뜯어주고, 장갑도 끼워주고, 1부터 10까지 자상하게 엄마가 친절하게 다 해준다. 그러다 보니 이아이는 잘하고 싶지만 할 수 있는게 많이 없는 것이다. 섬세한 손 조작 활동도 필요한 시기인데, 엄마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다 보니, 손의 섬세한 조작이 필요한 어린이집 활동에 참여하기 싫어한다. 그 시간이 되면 이 친구는 또 돌아다니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잘하고 싶은데 친구들 처럼 안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친구는 선생님한테 늘 지적받고 혼나는 아이가 되거나, 다른 친구들이 보기엔 놀이에 방해하고 맨날 돌아다니는 아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엄마의 친절함과 배려는 아이에게 결코 배려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심지어 친절하고 자상한 엄마의 정 반대인 무관심한 엄마를 둔 아이는 감정적 결핍은 있을지라도, 자기가 스스로 하는 일들을 스스로 터득해서인지, 어린이집 생활에 눈에 띄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친구의 경우에도 무척이나 자상하고 배려심많고 너무너무 친절한 엄마인 경우가 있다.


내 친구의  경우에는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반응이 일괄되게 친절 한 것이다. 이 아이는 엄마가 화내야 할 상황에도 친절하다 보니, 아이는 자신의 반응에 대한 다른 사람의 행동에 관심이 없다. 집에서는 한결 같이 늘 친절한 엄마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엄마가 화를 내거나 부정적 반응을 표출하지 않다보니, 다른사람의 반응에 관심없다. 엄마가 늘 한결같기 때문에 아이는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수정하거나 변경해야할 경우가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 상황이 몇년간 익숙해지다 보니 다른 사람 반응에 관심이 없다. 자신의 행동은 자신이 하고 싶은데로 스스로 선택만 하면 그만인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아이에게 나타난 변화는 언어의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사람의 반응에 관심없다 보니 다른사람의 말에도 관심이 없고 소리에도 관심없는 것이다. 그래서 5살이지만 발음이 정확하지 못해서 또래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증상은 발음이 부정확한 것이라 언어치료를 받고 있지만, 그 뒷 배경에는 너무 친절하고 일관되게 상냥한 반응을 표출하는 엄마의 배경도 있다고 본다.



 우리 부모 세대는 자신들이 대햑 교육을 끝까지 받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세대라, 자식의 대학교육까지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는게 매우 중요했던 세대이다. 경제적인 안정이 중요했던 세대라 자식들에게도 대학과 전공을 스스로 선택 할 수 있는 기회보다는, 수입이 안정적인 직장을 선택 할 수 있는 학과와 대학을 가라고 많이 요구 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오늘을 버려야 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오늘 즐겁게 하루를 보내는게 마치 미래를 위해 포기해야하는게 당연한것 마냥 길들여져있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자식의 세대에서는 자식들을 양육할때 아이들이 자율성을 갖게 두고 싶은 마음도 자연스럽게 내제된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이고 또래관계에서 적절한 상호작용을 이루게 해주려면,  제한이 없는 자율성을 아이에게 주는 것은 아이에게 더 큰 혼란을 초래한다는것을 부모로서 인지하고 있어야 할 듯 하다. 그리고 부모는 자율성과 자립심을 착각해서도 안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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