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하고 유난하게 일하는 사람

by SSOO

내 커리어의 가장 긴 기간을 R&D 제조업에서 보내왔기에 IT 기반 회사를 보면 결정적인 차이를 느낀다. 처음 스타트업에 들어왔을 때 각종 실리콘밸리發 책이나 아티클에서 언급되는 이야기들이 낯설었다. 예를 들면 MVP 출시, 일단 내놓고 빨리 개선한다, 우리 이렇게나 많이 업데이트한다는 자랑(?) 같은. 제조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당연한 공식처럼 돌고 있었다.


제조업의 DNA와 일하는 방식의 핵심이 어디 있냐 한다면 나는 수율에 있다 생각한다. 제조업의 수율이란 단순한 생산성 지표가 아니다. 수익성의 결정적 요인으로 수율이 1%만 낮아져도 원가부터 리드타임, 품질, 고객신뢰, 조직 내 긴장감까지 전방위로 큰 영향을 미친다. 비 제조업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때문에 수율에 사활을 걸고, 이는 곧 일의 완성도로 연결된다.


더구나 IT에서 말하는 에러라 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고, 목표와 각종 업무 관리와 회의 구조도 이에 맞춰진다. 빠른 개선이나 잦은 업데이트는 조직 피로도와 비용 소모로 이어지기에 당연히 해결이 될 수 없다. 더구나 불량의 심각도는 비교조차 어렵다. 예를 들면 차량이 불량이라 사고가 나면 생명을 잃을 수 있고, 휴대폰 배터리가 폭발해 화재가 나거나 통화 중 고막이 터질 수도, 눈 근처면 실명할 수도, 화학공장이 폭발하면 어떤 파급력인가.


제조업 기반의 한국 대기업 성장이 오랜 기간 이어졌고, 소위 군대식 기업문화도 이런 '품질' 집착이 한 원인일 거라 생각한다. 때문에 이런 조직에서 임원 이상 올라가신 분, 특히나 제조에 가까운 직군일수록 하나 같이 까다롭고 예민하며, 유난스럽고 지나칠 만큼 too much 하다. 이 때문에 생기는 비효율과 불만도 상당하고.


실무자 시절엔 이런 상사와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완성도와 속도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단연 속도인 난 더더욱. 그리고 그 끝판왕인 분을 팀장-직속 임원-CEO 쓰리콤보로 모시게 되며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임원과 구성원의 캐주얼한 식사조차 밑반찬 하나하나까지 다 체크해 보고할 정도. 하다 못해 난 빔 스크린을 사용할 땐 흰 바탕을, 멀티 모니터 스크린에서 강의할 땐 어두운 바탕의 슬라이드를 만든다. 멀티 모니터 스크린에서 강의할 땐 어두운 바탕의 슬라이드를 만든다. 멀티모니터라는 게 아무리 비싼 걸 써도 완전히 동일하기 어렵고 프레임이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런 사소함까지도 다 저런 조직에서 일한 산물이다. 물론 그중엔 다시 생각해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던 것도 많다. 그러나 당시엔 미처 몰랐다가 나중에야, 연차가 오르고 후배가 더 많아질수록 느끼는 건 그렇게 일하는 게 두 번 하지 않을 가능성을 확 줄이는 방법이었단 거다. 내 인생에서 지금까지도 가장 유난했던 세 분이지만, 이 분들도 그들의 상사에게 혀를 차셨던 걸 보며 내가 다음 세대임을 감사한다.


이런 분들을 오랜 기간 겪으며 알게 된 건 남들에게 과한 것들이 그들에겐 과하지 않고 "그렇게 하는 게 기본 아니야?"라는 거다. 이 사람들은 그게 유난이라 생각 않고 진심으로 그게 기본이자 마지노선이다. 즉, 기본이란 기준선이 월등히 높다는 거. 그들은 잘했다 칭찬받아도 "이게 내 일인데 무슨 칭찬씩이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내게 있어 누군가를 "유난스럽다, 예민하다"란 말은 일의 수준이 높다는 의미가 되었다. 물론 일을 넘어 사람에 대해, 관계에서는 좀 다른 얘기지만. 내가 보고 배운 중 가장 탁월했던 분들은 모두 유난했고, 예민했다. 이젠 힘을 좀 빼도 괜찮더란 케이스도 많이 쌓여 무조건 강강강으로 힘을 주진 않지만 강강강으로 일을 해보는 경험은 두고두고 힘이 된다. 이들에게 휴식은 '해보니 더 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휴식만 강조하는 사람들에겐 '좋은 것'이 되기도 한다.


이걸 다 알게 된 지금도 저런 사람들과 일하는 건 피곤하고 가끔은 짜증도 난다. 저들과 일하는 건 즐겁고 일하고 싶어 죽겠다는 마음이 들긴 어렵기도 하다. 일하는 재미란 무엇일까, 성장하고 싶다란 무엇일까를 잘 생각해 보면 결국 일이 되는 것, 내가 좀 더 나아지는 것, 전념을 다했다로 후회 없는 것이 아닐지. 직간접적인 경험상 편하게, 즐겁게는 일이 되고 성장하는 것과는 좀 다른 얘기더라. 좀 더 내가 즐겁게 학습하고, 관계를 맺고, 일에 몰입할 수 있게 할 수는 있지만 운동이 그렇듯 일도 괴로울 만큼 고통스럽게 몰입해 뭔가를 풀어낼 때 근육이 생기기 마련.


그래서 꼰대니 하는 말을 들어도 주니어일수록, 물경력일 수록 "빡센 회사"에서 일하시라 말씀드린다. 여기서 빡셈이란 무작정 희생하고 늦게까지 일하는 회사란 뜻은 아니다. 다만 '제대로' 빡센 회사를 가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잘 해내고 싶어 더 하게 되어 있다. 그런 게 문화가 된 곳에 아닌 사람, 혹은 나도 그런 사람이라고 믿는 아닌 사람이 들어가면 회사를 비난하곤 한다.


삶의 모든 장면이 그렇듯 뭐가 옳고 그르단 건 없고, 내가 원하는 게 뭐냐만이 유일한 가치 기준이 될 테지만. 한 번쯤은, 특히 한창 실무 뛰는 시기엔 제대로 빡세 유난함이 기본인 사람과 일해보길 추천한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 있다면, 본인의 '기본'이 상대보다 낮을 가능성이 높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성장할 수는 있어도 그와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불평하고 회피하기보단 어떻게 잘 뽑아 먹을지 고민하는 게 영리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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