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나를 정리하지 않는다
고통은 끝내 사라졌던 나의 부분을 다시금 상기할 수 있는 포착이다.
혹자는 고통이 성장을 위한 매개라고 한다.
하지만 “성장”이라는 건 결국 일정한 목적을 향해 수렴하여 달려가는 건데,
세속적인 목적과 당장 배 한번 불러보자고 거창한 포부 하나 말할 패기가 없는 나는
그저 고통과 함께 반드시 찾아오는 실존의 칼날이 기뻐서라고 해야 할까 싶다.
사실, “고통”이라는 건 매우 사변적이지 않을까.
예를 들자면 나를 짓누르고 있는 지금의 무게가 타인에게 이양되면 바로 짓뭉개지지 않을까?
반대로 너무나 삶이 우락부락하여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아팠지만
이후 어느 날에 찾아올 우리 메타버스 세계에서는
"고통의 상대값을 치환하여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라는 미니게임에 입장하여
상대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냈을 때
정말이지 “죽는다. 이러다가 죽어.”라는 아득함을 처음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한국인이라는 문화적 기인에 그대로 노출되어서인지
절제와 금언이 미덕이라고 암묵적으로 학습해서인지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외부로 발설하지 않는 괴짜의 습관을 가지고 있다.
되뇌이고 되뇌인다—라는 꽤나 멋드러진 철학관을 가지고 있으면 좋으련만,
그게 아니라 “힘들다.”라는 말 또한 언어적 습관으로 변모할 수 있는,
처음 사용하면 즉각 반응하게 되는 환각제이고
제때제때 쓰면 어느 순간 내성이 생기며,
“힘들다”는 게 정말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 말의 작용으로 인하여
몸 또한 그에 감응하는 형태로 상황이 역전되는 걸 숱하게 봐왔기에
그걸 경계하고자, 곧 다시 말해 고통에 대한 정확한 책정값이 희석되는 게 두려워서
말을 아끼고야 마는 다소 기이한 전개를 가지게 된다.
지금 말로 뻗쳐나오려 하는 입술을 저 멀리서 응시해보며
“정말 힘든 것인가?”에 대해서 곱씹고 자문하는 데 시간을 쓴다.
그래, 비효율적이다.
결국 나에 대한 답은 나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정확히는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메타인지화”하여 자신을 투사한다고 한들
이미 생득적인 환경에서 맺어진 인과관계라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수영장에서 잠영을 한다 하여도
숨이 차오르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는 거다.
그래서 매번 결론은 항상 잠정적인 형태로 귀결된다.
그건 곧 “이 또한 반드시 지나가리라.” 하는
실전경험을 통한 깨달은 유일한 공통성으로의 회귀이다.
나는 망각을 믿는다.
고통을 왜 수집하는가?
왜? 재밌으니까.
위에 언급했듯이 아무리 이해도와 인지의 폭이 넓어져도
다다르지 못한 나 자신의 고통에 대한 정확한 수치화와
그에 비교될 수 있는 타자들의 아우성에 대해
말뿐인 공감이 아니라 정말 구체적인 감정을 교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허나, 그 믿음도 “믿겠습니다.”라는 고해성사적인 낙관일 뿐,
아마도 평생 도달하지 못할 거라는 불투명성에 대한 명료한 의식.
그것이 나를 사유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