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너머의 것들을 붙잡고 싶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말할 수 없는 윤리와 형이상학과 사랑에 관하여 쉬이 입을 열지 못하는 건 결국 인지구조가 아무리 장대하다 한들 무한에 발산될 수 없고, 그마저도 유한의 벽인 언어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서야 말을 하면 공허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하고 나서 집에 돌아와 샤워를 끝내고 이불을 뒤집어쓰는 순간, 수많은 회의가 밀려온다. 하지만 그 회의조차 언어로는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다.
그렇다고 “끝내 말하지 않는다”를 하나의 상태로 고정짓는 것은, 나의 솟구치는 의문심을 잠재우기에는 인생이 너무 무료하다. 무료함은 곧 사멸이다. 삶이 아무리 길어도 그것이 무의미하다면, 우리는 이미 반쯤 죽은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조심스레, 그러나 끝내는 닿고자 좁혀나가는 사유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이를테면, 후에 사유실험의 주요 재료가 될 현재의 정치 구조에 대해 말해보자. 이제 ‘만인을 위한 만인의 평등한 기회’라는 말은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한정된 자본, 국토, 시간 속에서 결국 '누구에게 최적의 분배를 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이다. 많은 사람들은 ‘정답은 없다’는 말로 이 회색지대를 정리하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답이 없다는 말은 때때로 회피다. 언젠가 누군가는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 결정은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되며,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정답 없음’이라는 진공 속에서 얼마나 오래 유예할 수 있을까? 혹은 그 유예 자체가 또 다른 책임 회피는 아닐까?
나는 이 질문의 끝에 가닿고자 한다. 끝내 정답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먼지처럼 흩날리는 사유의 편린들 속에서 단 하나의 실마리, 새로운 정의(正義)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누군가에게, 언젠가는, 유효한 正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말할 수 없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나는 그 여정을 오늘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