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가 OTT 시장의 강자로 설 수 있었던 이유로 방대한 콘텐츠의 양, 접근성, 장르적 재미가 뛰어난 오리지널 시리즈의 확보 같은 것들을 들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하나 더 덧붙이자면 넷플릭스는 지브리를 가졌다는 점을 어필하고 싶다. 그렇다. 넷플릭스에서는 무려 21개의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을 볼 수 있다. 지브리에 대한 예찬을 하자면 사실 끝도 없겠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고집스러운 장인의 세계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옮겨 왔다는 것만으로도 넷플릭스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탄생한 애니메이션들은 사랑스러운 작화감과 때로는 웅장하고 때로는 아기자기한 스토리가 어우러져 특히나 어른들에게 어린이의 마음, 세계를 바라보는 깨끗한 마음 같은 것을 선사한다.
지브리의 매력은 그런 것. 그리고 작품들의 곳곳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품은 세계관을 유추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 말인즉슨,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은 안 보면 안 봤지 한 번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한 번만 봤다?? 그건 안 본 거나 마찬가지이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
나는 <마루 밑 아리에티>에 대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실제로 이 작품이 지브리의 작품 중에서 그리 유명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아리에티라는 캐릭터의 매력만큼은 손꼽을 만하다. 손가락만 한 작은 몸집의 소녀가 한껏 끌어올린 머리카락을 빨래집게로 질끈 묵고 풀숲을 뛰어다니는 요정 같은 모습을 보면 사랑스러움에 눈길을 거둘 수 없게 되고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모험을 통해 보여주는 내면의 단단함을 발견하는 순간엔 한번 더 반하고야 만다.
소인이라고 지칭하는 아리에티의 가족들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집 마루 밑에서 그들만의 세계를 이루고 살고 있다. 마루 위에 사는 인간들의 식료품, 생필품 같은 것을 가져다 생활하는데 이것을 소인들은 빌린다고 표현한다. 자신들의 존재를 들키지 않은 채 필요한 것들을 몰래 조달하며 생활해야 하는 그들의 생존은 매 순간 위험을 마주해야 하고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이들에게 살아남는다는 것은 하나의 숙명과도 같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그 작고 약한 존재도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깨달음을 느낄 수 있다.
장면들이 소인인 아리에티의 시점으로 그려져 있어 화면을 통해 보이는 인간들의 세상이 오히려 신기하게 보이기도 한다. 풀잎과 몽당연필 같은 물건들로 꾸며진 아리에티의 집 인테리어는 놀랍고 깜찍하다. 작고 사소한 일상의 물건들이 용도를 달리 한 채 빼곡하게 한 공간에 차 있는 배경을 보고 있자면 비현실적이면서도 묘하게 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개인적으로 아리에티의 엄마가 다 떨어져 가는 설탕 걱정을 하며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주부로서의 현실감이 느껴졌달까..... 필요한 것들을 빌리기 위해 처음으로 인간들의 공간에 몰래 잠입해야 하는 이 모험에 동행하게 된 날, 아리에티는 자신의 존재를 그 집에 사는 쇼우에게 들키고 만다.
쇼우는 몸이 약해 이 집으로 요양을 온 소년으로 자신의 병에 낙담하여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에티를 만나 작은 아리에티가 뿜어내는 생명력과 삶에 대한 의지를 바라보면서 자신도 점점 죽음과맞서려는 모습을 보인다. 다정한 쇼우는 아리에티를 위해 직접 물건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두 사람 사이의 은근하고 미묘한 우정이 싹트게 되지만 그것은 동시에 서로의 존재를 몰라야 한다는 이 세계의 규칙을 깨는 일이기도 했다.
쇼우의 행동을 의심하던 가정부에게 아리에티의 집이 발각되고 심술 맞은 그녀는 정교한 미니어처와도 같은 소인들의 집을 보고 놀라워하며 그곳에 있던 아리에티의 엄마를 납치해 가두게 된다. 하지만 결국 쇼우의 도움으로 아리에티는 엄마를 구출하게 되고 두 사람의 애틋한 이별을 뒤로하고 그들 가족은 결국 살던 곳을 떠나 냇가를 건너 숲으로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이 작품은 아리에티의 생에 대한 의지와 함께 공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표면적인 주제의 이면에 숨겨진 다양한 관점들도 함께 가져볼 수 있다.
제일 먼저 드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다른 존재에게 무언가를 빌려 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약한 존재와 강한 존재가 한 세계에 공존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은 애초에 존재하는 것일까? 쇼는 아리에티를 위해서 부모님이 준비 해 뒀던 비싼 인형의 집을 아리에티가 사는 곳에 가져다 놓지만 이것은 결국 소인들을 위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들켰다는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그들의 터전을 언젠가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후에 그것이 발단이 되어 아리에티의 집이 가정부에게 발각되고 엄마가 납치되기도 한다. 도와주고 싶은 쇼의 마음은 갸륵했지만 아리에티가 살던 곳을 떠나게 된 것은 어쩌면 그가 관여하지 말아야 할 세계를 넘보았기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한 가지, 스스로 자립할 수 없고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존재들의 존엄은 언제나 쉽게 손상된다는 점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소인들의 존재는 인간과 이 지구를 나눠 쓰는 생태계의 약한 존재들로 치환되어 읽히기도 한다.
이미 많은 환경을 인간들에게 맞춰 바꿔놓은 지금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많은 생명체들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녹아가는 북극의 얼음 덩어리를 온몸으로 붙잡고 바다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는 북극곰의 사진도 생각이 난다.
인간의 이기심을 탓하면서도 이토록 놀랍고 편리한 문명의 혜택을 받고 사는 나 역시 죄 많은 인간이라 이 문제만큼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무서운 일이다.
살 던 곳을 떠나 숲으로 가기 위해 주전자 위에 올라 미래로 향하는 아리에티의 모습에 희망을 넘어 해방감을 느꼈던 이유는 비록 또 다른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도 이제 더 이상 인간들의 물건을 빌려서 쓰는 생존 방식에서는 자유로워졌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인간들이 쓰는 물건과 달콤한 각설탕을 포기하는 대신 이제는 자립과 존엄성을 지켜 내는 생활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어쩌면 아리에티 가족의 마지막 행보는 거대한 자본주위 시스템 안에서 계속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 불안과 초조함을 느껴야 하는 인간들에게 주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생의 의지는 존엄을 지키려는 마음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이 영화에 얽힌 웃지 못할 개인적인 경험도 있다. 내가 비행이란 걸 하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브리핑 지각이라는 실수로 인해 팀장님께 받을 질책과 벌점, 진급의 유무, 서울 살이의 외로움 같은 것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며 그냥 다 그만둬 버릴까 하는 착잡한 마음과 그때의 상황을 다 잊고 싶은 마음으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상영이 끝난 뒤 , 스크린이 비워지고 영화관의 적막이 걷힐 때까지 의자에 앉아 혼자 엉엉 울고 있던 게 생각난다. ‘저 작은 것도 살겠다고 치마를 바늘로 꽂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데... 내가 뭐라고... 그까짓 게 뭐라고’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던 것도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웃픈 기억이기도 한데 그땐 정말 그랬다. 요 작은 아리에티가 나에게도 생의 의지를 다져 주었달까.
<마루 밑 아리에티>는 아기자기한 귀여움과 생에 대한 웅장한 감동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삶에 지쳐가는 어른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작품이다. 당신이 지치고 힘든 날, 이 작품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감동과 위로 그리고 어디에선가 진짜로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소인들에 대한 상상을 해보며 잃어버린 동심까지 찾아 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