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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가 Dec 22. 2020

왕가위의 모든 시작이 담긴 영화 , 아비정전

발 없는 새 아비



왕가위가 아비정전이 상영된 당시 관객들의 환불 사건이 대거 일어날 정도로 호된 실패를 겪었다는 뒷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째서 이 훌륭한 영화가 그 정도로 외면받았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홍콩 영화들이 대부분 액션, 무협, 코미디가 주류였으니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적지 않게 당황했음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왕가위가 말하고 싶어 하는 모든 상징과 은유들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이 영화가 그 당시 영화를 대하는 관객들의 태도와 맞지 않았을 거라고... 게다가 영화의 홍보를 위해 투척한 대어, 양조위는 영화가 거의 끝날 때쯤 겨우 얼굴을 내 비치니 양조위를 보려던 관객의 실망은 오죽했을까. (덕질을 해본 사람만 아는 분노랄까...)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영화의 진가는 빛나고 어찌 보면 지금봐도  촌스럽지 않은 왕가위표 영화의 미장센도 시대마다 재평가될 부분이라 감히 생각한다.
그만큼 장면 하나하나에 들인 시간이 길고, 유독 장면 하나마다 의논이 길었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당시 촬영 감독이었던 크리스토퍼 베일의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아비는 자신의 처지가 발 없는 새와 같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다.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 때문에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어른이 되어서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상대를 상처 입혀가며 스스로 고립시키려는 인물이다. 애초에 발 없는 새가 정착을 할 수 없는 건 땅에 내려가는 순간이 착륙이 아닌 추락이 될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근원을 모르는 이 남자는 방황의 이유를 생모와 양어머니에게 돌리려고 하나  자기 인생의 핵심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걸 몰랐던 어리석음 때문에 결국 기차 안에서 총을 맞고 죽게 된다. 그의 인생이 마지막까지 달리는 기차에서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채 끝이 난다는 게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아비는 분명 나약하고 모난 사람이 맞지만 그건 단지 젊고 서툴렀기 때문 아니었을까.  관계에 서투른 건 비단 아비뿐만은 아니다. 영화에 나온 모든 관계들이 서로 엇갈리고 정착하지 못한다. 모두가 각자의 진심만 안고 살아갈 뿐이다. 상대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채 말이다. 왕가위는 아비정전을 통해 불완전하고 불연속적인 사랑과 시간을 기억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필름 안에 박제해 둔 것이다.

사랑과 시간에 대한 이야기

아비정전, 그리고 화양연화에서 왕가위는 1960년대를 재현시킨다. 그가 유독 홍콩의 1960년대를 고집하는 이유를 홍콩의 대중문화가 황금기였던 그 시절에 대한 동경 때문이라고 하는 의견들이 있다. 하지만 또 다르게 보면 1960년대는 홍콩이 경제적인 과도기를 겪고 있는 시기였고, 소득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곳곳에서 홍콩에 이주한 젊은이들이 값싼 노동력으로 경제의 밑바탕이 되고 있던 시기. 그런 시기의 젊은이들은 불안하기 마련이고 나는 왕가위가 그런 불안한 젊은이들의 한 때를 홍콩의 1960년대와 같은 맥락으로 담고 싶어 한 것은 아닌 가 추측해 본다.
깔끔하고 사치스러운 아비의 집과 허름한 여관방의 내부가 대비되는 장면이 인상 깊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왕가위 하면 워낙 미장센의 장인으로 유명하지만 그것이 시각적으로 세련되고 아름답기만 해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왕가위가 “카메라”라는 매개체를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지가 영화 속에서 명확해 보이기 때문이다.
영상이던 사진이던 결국 렌즈와 필터를 거친 장면들은 기억에 대한 시각적 메타포를 만들어 내고 그것은 과거의 순간을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왕가위가 보여주는 영화 속 시간의 의미들을 곱씹다 보면 수리진이 아비와의 1분이라는 시간을 영원으로 여기는 것처럼, 인생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우리는 순간의 기억들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그런 순간들을 담은 게 바로 영화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어떤 순간에 담긴 사랑처럼, 마찬가지로 인생에는 영화 , 예술, 문화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닌 가 생각해 본다.
 
 왕가위 영화를 볼 때 영상에서 느껴지는 나른함은 셔터 스피드를 줄여서 찍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동작이 흘러 보이게 되는데 왕가위는 이런 효과를 재미있어했다고 한다.
내가 꽤 탁월하다고 느낀 화면 구성은 아비를 거울에 비춰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는데 지금이야 이런 장면을 많이 쓰고 있지만 그 당시는 꽤 세련된 화면 구성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정면이 아닌 거울에 비친 인물은 현실성이 사라지고 위태로운 느낌을 준다.
방황하는 아비의 내면을 표현하기에 이만한 연출은 없었을 것 같다.

 아비의 이야기는 얼핏 자기 연민으로 가득 찬 한 젊은이의 그저 그런 실패담쯤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엇갈린 관계들, 치기 어린 실수들을 보며 인물들에 대한 연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관객인 우리가 그 사이의 진심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여운으로 남아 한동안 또다시 나를 붙잡아 둔다. 푸르스름하고 축축한 밀림의 모습을 한 미지의 영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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