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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가 Dec 22. 2020

패왕별희 그리고 장국영

필름 속 아름다운 그대여...

주말 밤이면 이불속에 누워 발가락을 꼼지락 대며 한국어로 더빙된 주말의 명화와 토요 명화를 시청 하는 것은 어릴 적 잊지못할 내 즐거움 중 하나였다.

 


불 꺼진 방에서 새어 나오는 티브이 화면과 함께 빠라바바람하고 시그널 음악이 나올 때의 그 흥분과 설렘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디선가 주말의 명화 시그널 이었던 Exodus와 토요명화 시그널인 아랑후에즈 협주곡을 듣기라도 할 때면 여전히 가슴 한가운데서 파장이 일어난다.
어린 시절 추억 속에서 선명하게 남아 있는 영화들은 어른이 된 지금도 추억 삼아 가끔 찾아보곤 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영화를 꼽으라면 아마 패왕별희가 아닐까 싶다. 11살짜리 꼬마가 뭘 안다고 영화가 끝나고도 잠을 못 이룬 체 데이의 삶을 곱씹으며 배게 솜을 눈물로 적셨을까...



패왕별희를 처음 본 오래전, 영화가 끝나고도 온통 깜깜한 방안을 뜬눈으로 응시하며 길고 긴 여운에 밤을 뒤척이게 했던 그날 이후, 나는 장국영의 팬이 되었고 비디오 가게를 하던 친척 집에 놀러 갈 때면 이 때다 하고 장국영이 나오는 영화를 빌려 보곤 했다. 생각보다 비디오로 볼 수 있는 작품 수는 많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더욱 봤던 영화를 돌려보고 또 돌려봤다. 금옥만당 이란 영화는 아마 거짓말을 보태지 않고 스무 번은 봤을 터. 사실 어린 내가 볼 수 있는 작품들이 아녔음을  이제와 밝히지만 그렇다고 내가 호환 마마에 걸린 것도 또  특별히 음란하고 폭력적인 성인으로 자라지도 않은 것 같으니 시청 제한에 대한 문제는 묻어 두기로....

장국영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한 두 편이 아니겠지만, 역시나 나에게 그의 대표작은 누가 뭐래도 패왕별희다.

아마도 영화 속 우희의 삶과 장국영의 삶이 가장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성인이 되고 나서도 세 번 정도 패왕별희를 다시 보았다. 대작은 언제 봐도 대작이었고, 이 영화가 남긴

"예술은 과연 시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가"에 대한 질문과 혼란한 시대에 휘말려 자기 세계가 무너져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아름다운 우희의 눈빛이 늘 남는 영화였다. 아마 다시는 이런 영화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란 안타까움과 함께...




장국영이 아닌 우희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나에겐 배우와 역할이 일치되는 작품으로 여겨졌는데 언젠가 읽었던 장국영의 인터뷰를 보며 더욱 이런 생각이 확고해졌다. 그는 우희에 대해 완벽한 이해가 가능한 배우였다고....


“고사 속 우희는 강력한 욕망의 소유자로 패왕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완성했다. 그리고 패왕별희의 원작 소설에는 데이가 죽지 않는 것으로 끝났지만 나는 그 소설을 읽었을 때에도 데이가 결국은 자살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데이는 절대적인 아름다움과 예술을 추구하는 인물로 늙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름다운 우상인 채로 자신의 삶을 끝내려 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2002.02.22 홍콩 중문대에서>


후에 장국영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묘하게 이 인터뷰가 떠오르곤 했다.


패왕별희에서 장국영이 맡은 데이 역의 제자 소사 역을 맡았던 배우인 뢰한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장국영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촬영이 끝나고 휴식시간이 되면 그는 항상 촬영장 주변에 몰려든 팬에게 둘러싸여 있었는 데 그와 대화를 하고 있던 나와 조연배우들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장국영은 어린 여학생 팬들에게 우리를 소개하며 말하곤 했다. -너희들은 이 배우들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해 나는 홍콩에서 왔지만 이 사람들은 중국의 훌륭한 배우들이잖아-라고...
정말 매일같이 팬들이 찾아와 장국영에게 사인과 기념촬영을 하자고 조르는 통에 그는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사진이나 사인을 거부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언젠가는 숫기 없는 팬들 몇 명이 찾아와선 차마 그에게 다가오지도 못하고 , 하루 종일 촬영장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장국영은 먼저 그녀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더니 사인과 기념촬영까지 해주었었다, 나에게도 항상 자상하게 신경을 써줬는데 사부인 데이가 날 채찍으로 때리는 장면을 찍었을 때엔 오케이 사인이 나오자마자 나에게 달려와 혹시 아프지 않았냐며 걱정해 주었다.
당시 중국 본토 배우들은 촬영소의 숙소에 묵었고 장국영은 호텔에 묵었는데 그는 종종 밤에 야식을 사들고 촬영장 숙소를 찾아오곤 했었다. 그리고 촬영이 없는 날에는 모두를 좋은 음식점으로 데려가 밥을 샀다............... 내가 만난 장국영은 조금도 우울해 보이거나 불안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사에 너무나 완벽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다니 나는 그 이유를 함부로 추측하고 싶지 않다. 그저 정말 너무나 힘들어서 견딜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이 남긴 여러 이야기들 속 장국영은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화도 내지 않고 늘 주변 사람을 챙겼다는 그는 자신이 세상에 보낸 다정함의 절반이라도 보답받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장국영을 상징하는 그의 캐릭터들을 살펴보면 불안과 고독함을 품고 있으면서도 순간 아이 같은 마음을 내비치는 복잡한 존재들이었다. 그의 죽음이 후에 남겨진 필름 속 그의  기록들에  물들어 어째서인지 그가 남긴 영화들을 다시 보면 볼수록 쓸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잔잔히 퍼지고야 만다.

  

아름답고 안타까운 노스탤지어 같은 영화 패왕별희, 그리고 나의 장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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