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일한 땡땡이 되고 싶다(1)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서

by 세이하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을 갖기에 가장 강렬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내게는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


내 이름의 역사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여전히 이전 이름이 새겨진 아빠의 묘비를 물티슈로 닦으며 엄마에게 물었다.


“그렇지, 아빠가 지었지.”


시작은 엄마였다. 오빠 이름은 작명소에서 잘 받아지어 놓고서는 내 이름만큼은 직접 짓고 싶었던 엄마는 며칠 동안 작명 공부에 매진했다.


그 끝에 떠올린 이름이 ‘유정’이었는데, 하필 아빠 친구 딸과 이름이 같았고, 또 하필 그 딸이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등진 바람에 단번에 탈락했다. 그러다 당시 방영하던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아빠에 의해 단번에 후보로 올랐는데 그게 꽤 두 분의 마음에 들었던지 최종적으로 채택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의미 있는 한자를 골라 넣어 내 이름을 완성했다.


결국 유행하던 이름에 한자를 얹어 만든 셈이었는데, 그 결과 흔하기는 해도 담긴 의미만큼은 나름 특별한 이름이 되었다. 그 의미가 ‘지극히 온화하다’인데, 셋째 이모는 그걸 듣고는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세상에 지극히 온화해서 뭐할낀데!”


그러게요...?


그렇다고 할지라도,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인데 바꾸고 싶겠냐만은 여러 계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같은 학교에 나와 이름이 같고 성만 다른 허 씨, 장 씨, 최 씨, 이 씨들이 있었다. 그중 나는 허다한 성 가운데서도 하필 가장 흔한 김 씨였다. 친구들은 이야기를 하다가도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아니, 그 00 말고 다른 00!”


대학에 입학해서 교양 수업을 들을 때였다.


그 수업에는 백 명이 넘는 학생이 있었고 교수님은 매번 출석체크를 해야 했는데, 내 이름이 불리자 두 명이 더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성까지 완벽하게 같았다.


교수님은 출석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 이름 앞에 순번을 붙이기로 했다. 학번이 빠른 순대로 번호가 매겨졌고, 신입생이었던 나는 제일 뒤로 밀려났다. 그리하여, 그 학기 내내 나는 ‘세 번째 김 00!’으로 불려야 했다.


술만 먹으면 전화를 잘못 거는 선배도 있었다. 학번 차이가 꽤 나는, 사실상 친분이라 할 것도 없는 선배였는데 같은 동아리여서 번호를 교환했더랬다. 그러더니 가끔 새벽에 술에 취해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왔다. 당황해서 답장하니 동명이인과 착각했다고 미안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뒤로는 연락이 와 있어도 ‘아, 또?’ 하고는 모른 척.


어디 그뿐이랴. 나는 종종 누군가의 지인이 되곤 했다. 보통 “어! 내 사촌언니 이름도 그건데.”로 시작됐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의 친구가 되었다가 또 누군가의 동생, 누군가의 전애인, 심지어 누군가의 첫사랑까지 두루두루 섭렵했다. 그쯤 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이름은 왜 늘 누군가와 겹치는데?’


마침 들려온 친구 언니의 사연은 나를 더 자극했다. 그 언니는 실제로 나와 이름이 같았고, 나보다 먼저 이름을 바꿨다. 들어본 적 없는 독특한 이름이었는데, 친구 말로는 이름을 바꾸고 나서 정말 예전보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나도 덩달아 궁금해졌다.


‘혹시 나도 이름을 바꾸면 인생에 변화가 조금은 찾아올까?’


결국 나는 그 언니가 갔던 작명소를 찾아갔다.

칠만 원을 내고 총 다섯 개의 이름을 받았는데 대연, 노은, 도연, 태은 그리고 마지막은 태희였다.

내 성이 김 씨니까, 그러면 김태희.


“이 이름들이 백 점이야 백 점!”

“선생님, 그건 이미 너무 유명한 이름이잖아요...”


실망한 표정을 본 선생님은 점수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제 99점 이름들로! 태연..!!”

“그건 소녀시대예요..”

“그럼 95점짜리! 이것도 별로? 그럼 93점!”


이름은 점점 점수를 잃어갔다. 그러더니 선생님은 방법을 설명해 줄 테니 같이 좋은 조합을 찾아보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이건 어때요?”

“그건 90점 이하야.”

“이건요?”

“그것도 점수 미달.”


그나마 마음에 드는 조합들을 거의 점수 미달이었다.


그래서 나는 몇 년을 더 그 이름으로 살았다.

이십 대 중반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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