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내 인생이 순조로울 리가 없지.
막 성장하려 싹을 띄우던 생명력 가득했던 나는 영혼마저 메말라가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고 누군가가 나를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던 나의 고통은 엄마에 의해 던져졌다. 엄마는 나를 지켜주기보다는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이 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듯 나를 채찍질했다. 그 아저씨가 내게 했던 일들이 자꾸 생각나서 괴로웠고, 혹시라도 그날의 일을 물어보거나 호기심 가득한 질문들을 쏟아낼까 봐 내게 말 걸어오는 사람들의 눈이 무섭다고 울면서 얘기해도 엄마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우리 딸, 힘들겠다"가 아닌 "그런 걸 뭐 하러 자꾸 생각해! 숙제나 해!" 라던지 학교나 가라던지의 나무라는 말들 뿐이었다.
나만큼이나 어렸던 내 또래 아이들 또한 몸도 마음도 미성숙해서였을까. 자꾸만 괜찮은지를 물어봤다. 괜찮을 리가 없는데 꼭 괜찮다라는 말을 듣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계속 물어온다. 그러면서는 내게 괜찮아질 거라고. 힘들고 무서워하는 나를 이해한다고 했다. 정말 이해하는 걸까? 내가 며칠을 갇혀 맞고 당했던 일들과 나의 감정을 한 순간에 이해한다고? 이해한다는 말이 가식처럼 들렸고 전혀 괜찮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러한 관심들이 모여 동정이 되었다. 동정받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차라리 무관심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무차별한 호의들이 나를 더 괴롭게 했고 더 숨고 싶게 만들었다. 어느 누구도 나라는 사람이 어떤지 알아낼 수 없게 드러내지 않으려 숨으려 했고, 마음의 문 또한 단단히 걸어 잠갔다. 더뎌졌고 무뎌졌다. 감정을 잃어가고 있었고, 내 감정의 바깥에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가시가 돋았다. 무리에서 동떨어진 나는 자연스레 배척이 되었고,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불결한 아이가 되었다. 점차 어두워지던 난 학교에 가기가 싫다고 떼를 쓰는 날이 늘어갔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다 싫다고 아프다 핑계 대고 학교를 빠지기도 하니, 결국은 전학 가게 되었다.
전학 가면 뭐 하나. 주소지가 동일했기 때문에 그래봐야 옆 동네 학교로 간 것이었고, 전학 온 학교에서도 소문이 다 나버렸다. 진퇴양난이었다. 물러설 곳이 없었다. 숨 쉴 수 있는 곳이 없어 서서히 마음에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을 때 단 하나의 출구가 생겼다. 전학 간 학교의 담임 선생님이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오전 시간 중에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었는데 그 시간이 내겐 유일한 출구였다. 그전에도 사실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긴 했어도 크게 의미 두지는 않았는데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배우는 노래는 달랐다. 우리에게 가르쳐 줄 노래를 심사숙고하여 골라왔던게 분명하다. 멜로디도 가사도 좋은 동요들과 쉬운 가곡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다 너무나 좋은 곡들이었다. 노래를 배울 때마다 가사를 음미하며 선생님이 오르간으로 연주해 주는 음악에 맞춰 아이들과 같이 입 모아 부르는 그 시간은 황홀했다. 친구들과 굳이 친해지지 않아도 꼭 마음이 하나가 된 것처럼 부르는 합창소리는 내게 유일한 놀이이자 사회였다.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위로를 얻었고 노래 부르는 그 순간만큼은 새까맣게 나를 태우던 그 불덩이를 잠시나마 식힐 수 있어서 점점 더 노래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렇게 노래 안의 세상에서 비로소 내가 존재했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뭐든 했다. 노래를 잘 부르면 선생님은 이따금씩 나를 일으켜 세워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보라 했고, 눈에 띄어서 더 많은 기회를 얻기 위해 음악 공부도 열심히 했다. 다른 과목 성적들은 양가집규슈*를 면치 못했지만 음악 성적만은 우수했다. 음악 성적이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였다. 난 노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디든지 갔다. 초등학교 때는 방과 후 활동으로 합창을 하기도 했고, 엄마 따라 교회를 나가며 성가대를 들어가서 학생부 예배가 있을 때마다 노래를 불렀다. 그뿐인가. 일요일 예배 시간에 성가대로 서기 위해선 평일에 연습도 해야 했기 때문에 학교 끝나고 성가대 연습을 가기도 했고, 예배 끝난 후 또 연습에 참석하는 등 열정적이었다. 노래하는 내가 간절해 보였는지 성가대 지휘자 선생님은 내게 시립 어린이 합창단 오디션을 권했고, 난 단번에 합격했다. 개똥벌레 같은 내게도 재능이 있긴 있었구나 싶어 감히 꿈을 가졌다. 평생을 노래하는 꿈을 키우며 장래희망을 적을 기회가 있다면 늘 <성악가, 가수>라고 적었다.
*양가집규슈 : 성적표의 ‘수우미양가’ 등급 체계에서 성적이 낮은 여학생을 놀릴 때 쓰이는 말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열정적으로 다니던 합창단을 졸업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초등학생만 들어갈 수 있는 어린이 합창단이었기 때문에 중학교를 다니면 합창단을 졸업해야 했지만 난 합창단을 절대로 졸업하고 싶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계속 다니게 해달라고 합창단 선생님들에게 졸랐고, 그렇게 해서 중학교를 다니면서도 1년을 더 다녔고 진짜 합창단을 졸업할 때에, 합창단의 보컬선생님이 내게 성악을 권유했다. 나 정도면 재능이 있으니 아는 성악가 선생님을 소개해주겠다고. 그렇게 중학교 땐 성악 레슨을 받으며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했고 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고 진학은 학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아빠 때문에 못 갔지만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한 후에도 레슨을 고집하던 나는 성악을 계속 배웠으나 역시 내 인생은 순조로울 리가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내게 부모의 의무를 돈으로 사던 아빠가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