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 남짓한 어둠을 살아내던 그때.
고시원에는 세탁기는 공용으로 쓰는 것이 두 대가 있었다. 고시원에 거주하는 사람은 많지만 세탁기는 달랑 두 대였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는데, 내가 하교하고 오는 시간에는 늘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어서 난 세탁기를 포기하고 늘 무궁화표 빨래 비누로 세탁을 해야 했다. 손에는 습진이 생기고 피부가 벗겨져서 내 손은 뱀 피부 같았지만, 그 덕분에 난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를 풍기는 친구들과는 다르게 꿉꿉한 냄새를 풍기며 다녔다. 하루를 온전히 지나야 냄새가 사그라지기 시작하는 찰나에 늘 다시 고시원에 들어왔다. 고시원에 들어서면 바로 주방으로 후다닥 간다. 주방에는 쌀과 김치가 무상으로 제공되었는데 밥이 없어지기 전에 그거라도 얼른 먹어야 했다. 그 밥은 나의 일용할 양식이었다. 돈이 없던 내겐 밥과 김치가 공짜라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난 이때 밥 한 숟가락 떠서 김치를 밥 위에 얹어 입에 밀어 넣고 눈을 감으면서 주문을 외우면 정말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이건 케첩을 듬뿍 찍은 동그랑땡인 거야." 하면서 한 입. "이 번에는 멸치볶음을 얹어서 먹어볼까? 아, 맛있 다!" 하면서 또 한 입. 이렇게 생각하며 먹으면 정말 김치에서는 동그랑땡 맛과 멸치볶음 맛이 나는 것만 같았다. 밥을 다 먹고 나선 물 한잔을 떠 와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또 눈을 감으며, "아, 이건 콜라지! 캬, 시원하다!" 하며 한 모금. "환타가 이렇게 맛있었나? 역시 환타는 주황색이 최고야." 하며 또 한 모금.
나 자신에게 눈을 감고 최면을 걸며 밥과 김치, 그리고 물을 먹으며 살아내고 있었다. 내겐 밥을 사 먹을 수 있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고시원 월세 내주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면서 한 달에 5만 원을 용돈으로 줬다. 그 당시는 짜장면 한 그릇이 2500원, 어디 가서 국밥 한 그릇 먹으려면 5천 원, 6천 원 하는 시절이었다. 그럼 밥을 사 먹어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난 주말에도 차비가 드는 게 아까워 엄마를 보러 집에 못 간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 그건 핑계일 뿐 엄마를 보러 가고 싶지도 않았다.
말도 안 듣는 철없는 동생과 술을 그리 먹다가 뇌출혈로 쓰러진 아빠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술은 절대 먹으면 안되는 사람이 하루에 술 4병은 거뜬히 비워냈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윽박지르며 사네 못 사네 했는데,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뇌출혈이었으니 추적 관찰하며 약도 잘 먹고 운동도 해야하는데 아빠는 약은 커녕 술만 마셨다. 티비를 보면 암에 걸려도 살기 위해 어떻게든 건강을 되찾기 위해 애를 쓰며 사는 분들의 이야기는 우리 아빠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를 그렇게 때리며 괴롭히더니, 이젠 뇌출혈로 쓰러지고 나서도 괴롭히네 라는 생각에 내 마음 속엔 화가 가득했다. 이해할 수 없었고 한심했다. 저런 사람들이 내 부모라니. 나도 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런 힘든 상황 따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엄마는 아빠를 봐야 한다며, 나를 고시원에 넣어놓고서는 단 한 번도 날 보러 오지 않았다. 반찬 한 번 보내주지 않았고, 내가 어떻게 먹고 사는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엄마는 내게 5만 원을 보내주면 그것으로 부모의 도리를 다하는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엄마한테 고시원 방세와 용돈 5만 원을 받으면 은행에 가서 바로 현금으로 찾아 고시원 방세는 은행에서 나눠주는 봉투에 고이 넣어놓고, 은행 창구로 가서 용돈 5만 원은 천 원짜리와 백 원짜리로 바꿨다. 5만 원을 30일 혹은 31일로 나누면 대충 1600원 정도 됐기 때문에 밖에서 무엇이든지 사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친구들과 매점 가서 과자라도 하나 사 먹으려고 해도 즐겁게 갈 수 없었다. 한 달 용돈 5만 원으로 간식과 밥, 그리고 차비, 샴푸나 비누 등 모든 생활비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과자를 맛볼 처지가 아니었다. 너무나 독립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독립하고 싶진 않았다.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동의가 없이는 미성년자인 내가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노래방 도우미라도 해볼까 했지만 그런 걸 하기엔 키도 작았고 그리 예쁘지 않았을 뿐더로 그럴 깡다구도 없었다. 성적도 좋을 리가 없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 흔한 학원 하나 다니지 못했던 나는 그저 막막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감도 안 왔다. 내게 길잡이를 해주는 어른도 그 누구도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이 현실이, 현실이 아니길 바랐다. 자고 일어나면 내가 지나왔던 이 현실은 또 다른 차원의 내가 어쩌다 한 번 꾼 아주 생생한 꿈의 일부일 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죽고 싶었지만 죽을 용기가 없었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한 번은 굶어 죽어야지 하고 며칠을 굶었더니 머리가 핑 돌았다. 몸에 힘이 없어서 걷기도 힘들었다. 죽고 싶었는데 막상 죽을 것 같은 느낌에 진짜 이러다 죽을까 봐 되려 무서워졌다. 그때 알았다. 난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지금 내게 닥친 상황이 힘든 것일 뿐이라고. 내가 죽어봐야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고, 슬퍼할 사람도 없다는 것을. 내가 죽었는데 아무도 슬퍼해주지 않는다면 나의 죽음조차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텐데, 그만큼 비참한건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죽을 용기가 없다면 어떻게든 지금을 이겨내고 살아서 내가 스스로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해서 멋지게 독립해서 나를 방치했던 내 부모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 하지 않은가. 이 세상에 혼자 태어난 것처럼 내 부모를 잊어버린 듯 사는 것이 복수라 생각했다. 그렇게 독하게 마음을 먹고 이를 악물며 버텼다.
살고 싶었다. 증오심을 불태웠던 그 오기를 그러모아 어떻게든 살았다. 뒤늦게 공부했고, 뭐라도 해야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진로를 다시 탐색했고 공부했지만,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고3이라는 긴 터널의 끝을 드디어 마주했다. 졸업식이 다가왔는데 내 부모는 오지 않았다. 이젠 기대도 되지 않아서 그런가 실망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사진 찍으며 졸업식을 만끽하는 아이들 틈에서 졸업장과 졸업앨범을 받아 들고 재빠르게 학교를 나왔다. 지긋지긋했던 12년간의 학창 시절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