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 원망스러워.
뇌출혈로 쓰러진 아빠 앞으로 산재연금이 나왔다. 산재 승인을 받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막내였던 아빠를 고모들이 발 벗고 나서서 애써 변호사를 고용하여 소송을 도와주었고 결국 소송에서 이겼다. 산재연금에서 나오는 액수는 많진 않았지만 4인 가족이 허리띠를 졸라매면 충분히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후에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경제관념이 없었다기보다는 이제껏 자신을 위해 돈을 써 온 엄마는 매달 꼬박꼬박 나오는 산재연금으로 자신이 누려오던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써 댔다. 아빠가 쓰러지기 전엔 다달이 들어오는 월급이 꽤 컸으므로 형편이 여유 있는 편이었는데, 엄마는 무슨 계인지는 모르겠으나 매달 곗돈을 100만 원씩 내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해도 아빠가 아파서 쓰러졌다면 병원비, 약값, 생활비 등으로 돈이 나갈걸 생각하여 곗돈 내는 것을 중단했어야 하는데 엄마는 아빠 연금 중 절반이상의 금액인 100만 원을 계속 곗돈으로 내고 있었다. 곗돈을 내고, 교회에 십일조를 낸다고 꼬박꼬박 10%를 떼어다가 헌금은 해도 자식들 용돈 줄 돈은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 썼다. 아는 지인 실적 챙겨준다고 보험을 가입하지 않나, 뭔 가게를 차린다고 상가를 임차하고 장사하면서 돈을 다 날려먹질 않나. 덕분에 대학교 다닐 땐 정말 처절하게 살았다.
대학생활 4년을 생각해 보면, 아르바이트를 한 것과 도서관에서 살았던 것 말고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수업을 땡땡이치고 꽃구경을 간다거나, 친구들과 같이 가까운 바닷가에 놀러 가 헌팅을 한다던가 그런 건 사치였다. 그저 어떻게든 한 학기라도 덜 다니고 빨리 졸업하고 싶어 학점을 당길 수 있는 대로 최대한으로 당기기 위해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시간표에 강의를 꽉꽉 눌러 담아서 시간표엔 하루 8시간 중 공강 시간이 많아 봐야 2시간이고 보통 1시간이었다. 강의 사이에 시간이 빈틈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강의가 하나 끝날 때마다 다음 강의실로 바로 뛰어가야 했다. 현재 강의실이 있는 건물에서 먼 건물에서 수업을 받으러 가야 할 경우 전력을 다해 뛰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난 캠퍼스를 뛰어다니며 슾쳐지나가듯 피고 지는 꽃들과 떨어지는 잎들과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보며 느꼈다. 다른 곳에서 낭만을 챙겨가며 느껴 볼 여유가 없었다. 서글펐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 현실이 그런것을.
항상 마음속엔 커다란 응어리가 있지만 받아들였다. 그 응어리를 동력삼아 달렸다. 응어리가 희미해지려하면 다시 살려내어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버텨야 이기는거라고. 내 스스로의 문제가 아닌 그 외적인 이유로 쓰러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의도할 수 없는 것들은 제쳐두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문제들만 해결해나가야겠다 생각했다. 그것만이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이었고 내 삶의 방식이었다. 강의실과 건물들 사이를 누비며 뛰어다닐 때 말고는 도서관 열람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평소 강의들은 것을 노트에 정리하며 공부했다. 미친 듯이 공부해서 전액 장학금은 아니어도 일부라도 성적 장학금을 꼬박꼬박 받았다. 졸업할 때 평균 학점은 5점 만점에 4.24점이였고, 전체 석차 중 3등으로 남들보다 한 학기 빨리 졸업했다. 한 학기 빨리 졸업했으니 나름 조기졸업을 한 셈이지만 기쁘지 않았다. 온몸을 비틀며 아둥바둥 공부만 했기 때문에 추억같은건 없었다. 여행 한 번, 나들이 한 번 가본적이 없었다. 그렇게 캠퍼스의 낭만과는 거리가 먼 대학생활을 보냈다
왜 그렇게 공부했을까. 왜 대학교를 갔을까. 남들 다 가니 가긴 갔는데, 학사 학위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길래 대학교를 가서 열심히 공부했고 졸업은 했다. 그런데 대학교를 졸업하고 남은 건 3000만 원에 육박하는 학자금대출과, 자격증 하나 없는 무력한 스펙이었다. 자격증이나 다른 활동들은 챙길 엄두도 안 났었다. 자격증을 따려면, 응시료도 내야 하고 공부하려면 책도 사야 하는데 돈이 없었다. 대학교를 다니며 쉴 새 없이 아르바이트를 하긴 했지만, 학교를 다니며 일했기 때문에 근무시간이 길지 않았으니 알바를 해도 손에 쥐는 돈은 20-30만 원이었다. 그 돈으로 쪼개서 아껴서 쓰고, 돈을 모았다가 학기 초에 책을 사야 했다. 그리고 학자금 대출을 조금이라도 덜 받으려면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했다. 엄마가 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과 활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들, 생활비, 등록금, 책값 등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러니 일단은 학점부터 잘 받아서 제일 필요한 졸업부터 먼저 하고 취업하는 것이 목표였다.
대학교를 졸업하고선 취업 전까진 어쩔 수 없이 엄마 아빠가 있는 집으로 들어가서 살아야 했다. 아빠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뇌출혈로 처음 쓰러지고 내가 대학교 다닐 때 또 한 번 쓰러졌다. 매일 술을 마시니 재발하지 않을 리가 있나 싶었고 놀랍진 않았다. 병원을 다니고 그 많은 병원비들을 내고 나면 뭐 하나. 퇴원하고 집에 와선 또 술을 하루에 4병은 거뜬히 마셨다. 매일 술 마시는 아빠와 그걸 방관하는 엄마 그리고 한 배에서 나왔어도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동생. 답이 없는 집안에서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었다.
노래 부르는 것 말고는 특별하게 잘하는 것은 없었지만, 음악 말고는 그다음으로 성적이 좋은 것이 경제과목이었으니 경영•경제과목으로 대학을 갈까 했고 그렇게 선택한 경영학과를 무사졸업했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면 무난하게라도 살고 싶어서 했던 선택이었지만, 자격증 하나 없는 지방대 경영학과 출신이 갈 수 있는 곳은 딱히 없었다. 쇼핑몰이나 일반 중소기업들보다 차라리 노력하면 노력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영업직을 해보자 라는 생각에 취업한 곳은 보험회사의 영업직이었다.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것 같은 앳된 얼굴과 작은 키로 보험영업이라니. 귀엽고 당차긴 하지만 베테랑 직원분들이 보기엔 보험영업팀에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출근한 지 일주일쯤 되었을까. 팀장님이 날 따로 부르더니 다른 곳으로 가보는 게 어떻겠냐 하며 추천해 준 곳은 다른 보험회사에 대졸자들로 구성된 스마트영업팀이었다.
보험회사라 해서 떨떠름했던 엄마지만 스마트영업팀이라니 탈출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난 회사에서 지하철로 30분 거리에 방을 얻었다. 내가 입사한 영업팀은 내 나이 또래들, 언니 오빠들로 총 18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입사해서 교육받는 3개월 동안 우린 점심시간에도 늘 함께 밥을 먹었고 캔커피를 마실 때도 18명이 함께였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소속감과 동지애. 행복했다. 지긋지긋한 엄마아빠와 집 현관 옆에 포대자루 한가득 채워진 소주병을 보지 않아도 되었고, 원룸텔이었지만 고시원과는 달리 작은 창이 있어 아침 햇살을 느낄 수 있어서 기뻤다. 잘 살아보려고 의지를 황홀하게 불태웠고 희망을 품기도 했다.
회사 생활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때, 어느 날 엄마에게서 전화가 온다. 아빠가 또 쓰러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 재발이니 세 번째 쓰러진 셈이다. 한 번이 놀랍지, 두 번째 쓰러졌을 땐 놀랍진 않았고 세 번째 역시 무덤덤했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뇌혈관이 크게 터져서 위중하다는 것이다. 의사에게 두 번째 듣는 마음의 준비. 저렇게 맨날 술이나 먹으니 멀쩡할 리가 있을까. 그냥 차라리 갔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보란 듯이 아빠는 또 살았다. 이번에도 살았지만 산 것이 아닌 것같이 살았다. 숨만 붙어 있었다. 생각보다 사람의 생명력은 질기다는 것을 보여주듯 아빠는 식물인간 상태로 몸 하나 움직이지도 못하고, 주변 자극에 눈만 꿈뻑꿈뻑할 뿐, 말 한마디도 할 수 없었고 알아듣지도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냥 목석같은 뼈다귀에 숨이 붙어있는 몸만 사람이었다.
당연히 퇴원은 할 수 없었다. 늘 병원에서 24시간 케어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오래 누워있을수록 목에 가래가 찼는데, 목에 구멍을 뚫어 계속 차는 가래를 빼줘야 했다. 그리고 의식이 없이 누워있기 때문에 혼자 뭘 먹을 수 없어서 콧줄을 넣어 아침 점심 저녁 유동식을 급여했다. 늘 사람이 붙어있어서 패드도 갈아주고, 욕창이 생기지 않게 자세를 자주 바꿔줘가며 닦아줘야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다시 병원에 묶였다. 내가 지내던 원룸텔은 방을 빼서 보증금은 엄마한테 주고, 엄마와 동생과 함께 병원 근처에 월세를 얻었다. 회사 가는데에 오래 걸린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엄마와 동생이 같이 살면서부터 동생이 학교 갔다 올 동안 엄마가 아빠를 보고, 내가 퇴근하고 오면 동생과 교대하고 아빠를 보다가 출근해야 하니 10시쯤 집에 들어가면 엄마는 밤부터 다음날 동생 올 때까지 병원에 있었다. 그렇게 온 식구가 매달렸는데 그걸로 부족했나 보다.
"꼴랑 이백만 원도 안되게 버는 주제에. 네가 산재에서 나오는 것만큼 벌어서 갖다 줄 거 아니면 일 그만둬."
엄마가 회사를 그만두라 했다. 아빠 산재보험에서 병원에 입원하면 병원비 입원비가 나오는 게 있는데, 내가 일을 하고 있어 소득이 있으니 안 나온다는 게 이유였다. 내가 많이 벌진 못해도 이제 회사에 적응하고 있는데 왜 또 그만두라 하냐고 소리쳐봤지만 막무가내였다. 엄마 말 안 들을 거면 집에서 나가라고 했는데, 난 이미 방을 빼서 보증금을 엄마한테 줬기 때문에 다시 방을 구할 돈이 없었고, 결국 입사 두 달 반 만에 난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엄마와 함께 병원에서 아빠를 하루 종일 돌보는 삶이 시작되었다. 난 살아있었지만 내가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제껏 살면서 나 자신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늘 참고 억눌러야 했고 표현하지 말아야 했다. 의견을 내거나 입장을 표명하면 비난으로 돌아왔다. 우리집에선 다름은 곧 죄악이었다. 하나님을 믿는 엄마는 본인이 선함의 기준이라 생각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난 늘 죄 많은 사람이었고, 엄마 생각네 반하는 일들이 많기에 난 늘 회개해야하는 사람이었다. 정말 신이 있다면 날 이렇게 살게해선 안되는거였다. 좌절했다. 그저 평범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인가. 그것은 내겐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식물인간이 되어 죽지 못해 사는 사람과 자식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없는 무정한 아줌마 때문에 20대의 찬란한 시간을 그렇게 잃어버리고 있었다. 다시 내 삶이 멈췄다. 나도 어떻게든 살아보고 싶은데, 내가 꿈꿀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또 다시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으며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