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한 번 주저앉혀봐. 난 다시 일어설 테니까.
아빠가 세 번째로 쓰러지고 나서 우리 가족의 시간은 멈췄다. 산재연금을 받으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해 가며 지냈다. 병원에 교대로 왔다 갔다 하며 지내는 동안 나뿐만 아니라 엄마와 동생도 마음의 병이 들었다. 제아무리 가족끼리 뭉쳐 한 마음 한 뜻으로 살아낸다 해도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가족도 행복할 수 없다. 고통은 암세포처럼 구석구석 숨어있다가 무너진 마음의 틈새를 따라 다시금 피어올랐다. 나의 고통이 가족의 고통이 되고, 나누어진 고통은 절반이 아니라 두 배가 되었다. 우린 그렇게 병원에 메어있어 힘든 와중에도 지쳐가던 나머지 가족의 운명보다는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동생은 학교 공부를 핑계로 아빠를 돌보는 걸 소홀히 했고, 동생이 비운 시간 동안은 엄마와 나의 고통이 되어 돌아왔다. 엄마는 공과금, 세금 등의 일을 봐야 한다는 핑계로 자리를 비웠고 그 시간 동안 동생은 뾰로통 입이 나와 병원에 앉아있거나 나의 시간으로 채웠다. 게다가 난 산재연금이 끊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엄마 때문에 4대 보험이 들어가는 직장생활을 하지 못해 불만이 가중되었고, 그 시간 동안 친구들은 신입시절을 벗어나 어엿한 직장인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을 보며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 즈음부터 우울증을 겪기 시작했다. 가족이라는 굴레 속에 한 사람을 돌보기 위해 온 가족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엄마와 동생이 아빠를 팽개치고 집에서 잔 날, 난 병원에 홀로 있으며 의식 없는 아빠를 원망에 찬 눈빛으로 노려보다가 불현듯 자살충동을 느꼈다. 멀쩡할 때에도, 쓰러져 누워있을 때도 날 구렁텅이에 떨어뜨린 아빠를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병실은 4인실이었는데 모두가 잠든 시간 난 병상의 커튼을 두르고 숨 죽여 가슴을 쥐어뜯어가며 울었다. 잠시나마 그렇게 나쁜 생각을 했다는 죄책감과 나약해진 내 자신, 그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막막한 현실이 너무나 슬프고 아프고 원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한바탕 울고 나서 진정하고 나니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먹구름이 걷히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부터 살자. 내가 없으면 이 세상은 존재해도 무의미한 거라고. 내 인생은 엄마나 동생이 살아주는 것은 아니니까 내 인생은 내가 구원해야겠다 싶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이력서를 넣었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엄마와 동생이 내팽개쳤을 때도 내가 아빠를 봤던 것처럼, 내가 없으면 엄마나 동생 둘 중 누군가는 보겠지 했다. 상의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을 보내다간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잉여인간이 될 것만 같은 위기감에 뭐라도 해야 했다. 나도 내 삶을 살고 싶었다. 아빠를 본다고 병원에 매달리는 동안 나의 건강도 악화되어 갔다. 게다가 학자금대출의 거치기간 동안 이자만 내는 기간이 끝나가고 원금과 함께 상환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위기감은 고조되었다.
난 웹사이트를 기획하고 만드는 웹개발회사의 경리로 취업하여 일하기 시작했다. 엄마한테 전화가 빗발치고 동생의 원망이 하늘을 찔렀지만 무시했다. 살고 싶었다. 내가 살지 못하면 그럼 엄마가 내 인생 대신 살아주던가. 그게 아니라면 말리지 말라고. 대표가 지시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다. 급여는 적어도 일단 일 년 반 만에 다시 취업하여 일하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틔였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 엄마는 아빠가 좀 안정기에 접어들고서는 다시 살던 지역으로 아빠를 데리고 요양병원으로 옮겨갔다. 병원 근처에 얻었던 주택에는 다시금 나 혼자 남았고 홀로 지냈다. 이대로 다시 잘 살아보자 라는 의욕이 샘솟을 때쯤 내 원룸으로 갑자기 독촉장이 날아든다.
아빠 병원을 왔다 갔다 하면 매번 사설 구급차를 부르려면 돈이 많이 드니 차가 필요하다 생각했던 엄마는 돈도 없으면서 나에게 말 한마디 없이 나를 연대보증인으로 세워 자동차를 구입했던 것이다. 차를 구입하고 원금을 제대로 갚지 않아 연대보증인이던 나에게 독촉장이 날아든 것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싶었는데 내 인감과 주민등록증이 엄마 손에 있었다. 엄마가 다시 살던 지역으로 돌아가면서 짐을 챙겨서 갔는데 엄마가 내 주민등록증과 인감을 가져갔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난 엄마에게 신용카드를 만들어 줬다. 가족이랍시고 엄마는 신용불량자라 카드를 못 만드는데 돈이 없어 아빠 병원비 결제가 힘들다며 카드 하나만 만들어달라 했다. 엄마가 갚으며 쓰겠다고 해서 그 말을 믿고 카드를 만들어 빌려줬더니 카드를 돌려줄 생각을 하지 않고 마음껏 써 댔던 것이다.
나중에 은행에서 전화가 오고 나서야 알았다. 아빠 병원비 할부금에 엄마가 써 댄 금액까지. 카드 한도가 400만 원이었는데, 한도가 꽉 차 있었고 엄마는 그것을 내지 않았다. 결국 내가 갚기 시작했다. 분명 갚고 있었는데, 카드값이 줄어들지 않았다. 내 신용도가 바닥을 찍고 나도 신용불량자가 되면 급여를 받는 직장생활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갚고 있었는데 엄마는 그러는 동안에도 카드를 쓰고 있었다. 엄마가 알아서 하라고 그냥 두고 싶지만 그렇게 갚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내가 짊어지게 된다. 카드를 빌려준 나의 책임이니까. 그 당시 한 달 급여가 세후 120만 원 남짓 들어왔는데, 엄마 쓴 카드값에다가 방세 20만 원, 공과금 10만 원 남짓. 그리고 점심 식비에다가 학자금대출 상환금까지 하면 남는 것이 없었다. 돈이 남기는커녕 부족해서 밥 값을 줄여야 했고, 출퇴근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이따금씩 야근할 때면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 회사 책상에 엎드려 자기도 했다.
내가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엄마는 아빠가 퇴원해서 요양병원으로 가자 다시 본인을 위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니던 교회의 교인들한테 돈을 빌리고, 여기저기 돈을 빌리다가 교회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결심했다. 내겐 가족이 없다고 생각하기로. 난 혼자 이 세상에 별의 실수로 태어난 아이라고. 다신 돌아가지 않고, 다신 돌아보지도 가여워하지도 안타까워하지도 않을 거라고. 그러는 사이에 난 겨울에 거위털이나 오리털이 들어간 패딩 하나 없이 얇은 가을 바람막이 하나를 입고 살기도 했다. 쌀을 살 돈조차 부족해 동네 슈퍼 사장님께 사정을 말하고 쌀을 꿔다가 먹고, 갚기를 반복했다. 그 흔한 치맥조차 편하게 못했고, 약속은커녕 퇴근하면 바로 집에 들어와 쌀과 3분짜장 한 봉지를 세끼에 걸쳐 나눠서 먹는 등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버텼다.
내게 미래를 그릴 힘이 없었다. 그저 눈앞의 현실만 봐야 했고, 오늘이 가장 중요했다. 오늘을 살아내야 내일도 오기 때문에 작은 돈이라도 일할 수 있음에 감사했고, 돈은 벌지만 쓸 돈은 없어도 무언갈 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행복했다. 남을 부러워하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택했고 다름을 받아들였다. 후회하는 대신 현재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며 내 자신을 달랬다. 그런 내게 취미나 연애는 사치였고, 그저 오늘 조금 덜 배고프고, 일하고 집에 올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절대 엄마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결혼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다. 나의 시궁창 같은 삶을 누군가에게 들키는 게 싫었고 혹여나 생길 자식들이 그걸 닮기라도 할까 봐 싫었다. 난 그저 내가 사는 동안 내겐 나 혼자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부모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그들을 닮은 점을 모조리 없애버릴 거라고. 내 생활습관, 언어, 생각 등에서 가족들을 지워내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가족을 버렸다며 저주를 퍼부었지만, 그 저주에서 난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난 시간을 잃었으나 삶의 의지를 얻었고, 그 힘든 시간 속에서도 희망을 불태웠다. 보란 듯이 나라도 잘 살아서 사람답게 살아낼 거라고 다짐하며 울분을 삼켰다. 내가 삼킨 울분은 양분이 되어 평범하게 살고 싶은 내 꿈을 싹 틔울 거라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