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도 되는 걸까.
경리로 일하며 받은 급여는 많진 않았지만 즐겁고 보람차게 일했다. 일할 수 있어 좋았고 행복했다. 시간이 흘러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퇴사하긴 했지만 다행히 나름 전공을 살려 쉬지 않고 바로 세무사무실에 취업했다. 세무사무실에선 나 혼자 대졸자였다. 다른 직원들은 상고를 졸업해서 바로 세무사무실에 취업한 경우로,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안났지만 경력은 훨씬 많은 베테랑들이었다. 선배님이라 부르며 많은 것을 배웠고 조금씩 성장해나갔다. 세무사무실 급여는 이전 회사보다도 더 적었지만 기장대리라는 것이 너무 재밌었고 적성에도 잘 맞는듯했다. 열정페이였던 셈이지만 불만은 없었다. 세무사무실은 연초부터 7월까지 퇴근을 못할 정도로 바빠서 사무실에서 자기도 하는 등 몸은 힘들었지만 즐겁게 일했다. 그랬던 덕분에 기장하거나 회계처리하는 부분에 흥미를 가질 수 있었고, 습득하는 속도와 일처리가 빨라지면서 칭찬을 받기 시작하자 그것을 질투했던 같은 팀의 선배가 적응 못하게 날 밀어내려 애를 써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 물론 일 자체가 즐겁기도 했지만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던 나의 원동력은 집에 돌아가지 않는 것에 있었다.
엄마는 쥐콩만큼 벌면서 월세나 공과금 그리고 생활비들을 감당하고 사느냐고 집으로 들어오라고 계속 재촉했다. 내가 집으로 들어가면 엄마는 아빠를 돌봐야하는 시간 대신 여유가 생기기 때문에 내가 있었으면 했던 것이다. 틈만 나면 전화해서 잘 지내냐고 물어봤고 목소리가 피곤하거나 힘들어보일 때면 어김없이 그만두고 집에 오라고 했다. 어림없었다. 다신 내 시간을 축내기 싫었다.
그만큼 나의 청춘과 시간을 썼으면 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매정하다고 할지 몰라도 이제껏 가족이라는 족쇄 안에서 희생해야만 했고, 당해야만 했던 것들로 미뤄보면 잃어버렸던 시간들과 그동안 포기해야 했던 것들, 받은 상처들을 생각하면 난 충분히 도리는 다한 것 같았다. 엄마는 나보고 내 인생만 생각하는 너는 인간쓰레기라고 하며 뾰족한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었고 내가 상처받고 힘들어하길 원했던 것 같지만, 상처받을지언정 흔들리지 않았다. 죽는 한이 있어도 혼자 살다 죽을 거라는 생각으로 이 악물고 버텼고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가족에게서 도망치듯 떨어져 나와 취업했던 회사에서 알게 된 과장님이 있었다. 그 과장님은 개발자였는데 개발 프로젝트로 파견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했었다. 프로그램 개발 특성상 야근이 많아 야근 식대와 교통비가 꽤 많이 발생한다. 이 비용들을 회사에 품의서를 제출해 정산을 받아야 하는데, 품의서를 올려도 대표님 혼자 모든 업무를 다 보고 있었던 터라 후순위로 밀려 처리되지 못한 미정산 금액들이 많이 밀려있었고, 내가 입사한 이후로 밀린 것과 이후 직원들의 지출품의서에 대한 결재를 신속하게 처리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본사로 복귀한 과장님은 그에 대해 고마워했고 서로 농담도 주고받으며 친해졌다.
쑥스럽지만 그때 당시 똑소리 나게 일처리를 잘했기 때문인지 대표님도 직원들도 내가 일하는 것과 개인적인 성격 모두 예쁘게 봐주셨는데 과장님도 그랬다. 어느 날, 개발팀에 일이 있어 갔다가 과장님한테 소개팅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같이 일했던 사람 중에 착한 남자애가 있는데, 나와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적극 추천한다는 거였다.
"소개팅 안 해볼래요? 내가 아는 개발자가 있는데, 둘이 잘 어울릴 거 같아서요."
"에이 과장님. 저랑 안 보고 싶으세요? 저 돈 없어요 연애할 여유도 없고요."
"그러지 말고 생각해 봐요. 괜찮은 남자애가 있어요."
"음.... 과장님과 같은 개발자라면.... 싫어요. 푸하하하하"
그렇게 대화한 후 개발자 사무실에서 도망쳐 나왔다. 우스갯소리로 거절하긴 했지만, 사실 하루하루 쓸 수 있는 돈을 정해가며 간신히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연애는 엄두도 안 났었다. 무엇보다 내 상황이 드러나는 것이 부끄럽고 싫었다. 나의 상황이 나를 만나게 될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할 것 같고 실례가 될 것 같아 거절을 했었는데 이후에도 계속 소개팅 권유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회사가 어려워져서 직원들이 하나, 둘, 퇴사를 하게 되었고 나 역시 퇴사했다. 퇴사 후 과장님이 연락와서는 "이제 같은 회사 안 다니니까 소개팅해봐도 되지 않아요?" 하며 무려 4개월 동안이나 종종 연락이 와서 예의상 몇 번 만나다 거절할 생각으로 결국 수락했고 만나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의 반쪽도 나도 소개팅 해달라고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 과장님이 보기에 잘 맞을거라 생각했는지 밀어붙였던 것이다.
처음 만난 내 반쪽의 첫인상은 수더분했다. 처음 본 순간에 웃으며 인사를 하는데 웃는 것이 환하고 밝은 남자를 정말 오랜만에 봐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었다. 옷을 깔끔하게 신경 써서 입어놓고 재킷의 카라 정돈이 덜 되어 한쪽이 접혀있었는데 그 모습도 어리숙해 보여 귀여웠다. 난 칼질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 식사하는 자리가 하필 스테이크를 파는 레스토랑이었다. 칼질을 잘하지 못해 고기를 잘 자르지도 못하고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나를 봤는지, 본인 앞에 있는 스테이크를 정갈하게 썰어서 내 앞의 스테이크와 바꿔주었다. 사람을 만나 설레는 것이 처음이었다. 내게도 이런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럼 뭐 하나. 나를 보여주면 나를 당연히 떠나가겠지라고 생각했던 나는 마음이 못난 아이였다. 이런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애프터 신청을 해주고 지속적으로 만나자고 연락이 해왔다. 만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내가 드러났다. 나의 가족사, 살아왔던 이야기, 그리고 나의 상황까지. 그런 어두운 내면을 모두 얘기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그럴수록 나를 포용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부모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긴 했지만 나와는 또 다른 아픔과 고통을 지니고 있었다. 나의 아픔을 견뎌내며 이고 사느라 타인의 마음 따위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고 타인의 아픔같은건 살펴볼 마음의 여유가 없어 모른 척하며 살아온 나에게 마음을 열어 준 이 남자의 아픔이 철벽 같은 내 마음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처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듬어주고 싶었다.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지켜야 할 것이 생긴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의 모습을 알고도 사랑해 주는 반쪽과 함께 자연스레 미래를 꿈꾸게 되었는데, 이 관계를 유지하면 할수록 그만큼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많아졌다. 이 사람을 잃으면 난 다신 아무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인데, 일단 학자금대출과 엄마가 쓴 카드빚과 엄마가 나 몰래 내 이름으로 보증을 서서 생긴 빚을 해결해야 했다. 과거의 빚을 미래를 나눌 사람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았다.
내 나이 스물여섯, 내 앞에 남겨진 빚은 3천만 원이었다. 내 급여로는 생활비를 제외하고 나면 모을 수 있는 돈은 당연히 없었고, 월급의 70%를 학자금대출금과 엄마 빚을 상환하는 데에 썼다. 재정상황이 너무나 어려웠고 엄마는 자기 자신이 만들어놓은 빚을 내게 떠넘겨놓고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 도움이라곤 받을 수 없었다. 그랬던 나는 한달살이처럼 겨우 살아가고 있었고 그것이 반쪽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다. 전환대출도 알아보는 등 다방면으로 알아보다가 개인회생제도를 알게 되었다. 생활비를 보장받을 수 있었고, 법정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 금액으로 변제하는 것인데, 개인회생 인가 후 5년 동안 빠짐없이 변제를 하게 되면 나머지 변제 못한 금액은 면책해 주는 제도였다. 나같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빚을 해결하기에 좋은 제도였던 것이다.
개인회생 신청을 하려고 법무사 사무실을 찾아갔는데, 거기서 실장님이 어린 나의 사연을 듣더니 안타까워하셨다. 보통 법무사 수수료의 경우 일시불로 지불해야 하는데, 난 그마저도 지불할 수 있는 돈이 없어 사정을 말씀드렸고 감사하게도 수수료를 3개월에 나눠 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개인회생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변제계획서와 이 빚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 써야 하는 진술서, 그리고 필요서류들을 얘기하면 바로바로 떼서 드렸고, 이후 채권자와의 대면과 회생 재판참석 후 회생인가까지 2개월 만에 완료되었다.
그제야 난 나의 반쪽에게 얘기했고, 같이 법원에 가 회생에 대한 서류를 열람하기도 하며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들을 스스로 조용히 처리했다는 것이 마음 쓰였던 나의 반쪽은 나를 따뜻하게 격려해 주고 안아주었다. 희망이 따스하게 피어올랐다. 짙은 안개사이로 가려져 있던 미래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완벽한 독립을 할 수 있는 결혼도 꿈꾸기 시작했다.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불안했던 나의 삶에 안정감과 그로인한 희망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