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까.
서로를 증오하거나 어쩔 수 없이 같이 사는 것이 결혼이라면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던 나는 결혼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아직 삶이 어린 나에겐 배우자를 찾는 과정 또한 겪어본 적 없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온갖 감언이설에 매료되어 결혼을 한다 하여도 행복하다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라는 생각에 내 인생을 건 도박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비혼주의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 중에 유일한 비혼주의자였고,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데만 집중하는 인생을 사는 내겐 결혼은 언감생심, 생각지도 못할 것이었다. 그랬던 내가 소개팅을 하고 잠깐 만나고 말고자 했던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각자의 반쪽을 내어주며 서로의 반쪽이 되었다. 반쪽을 내어준다는 것은 각자의 인생을 내어주었다는 의미와 같을 것이다.
결혼을 준비하며 심적으로 참 힘들었다. 엄마가 종교를 핑계로 교회 안 다니는 사위는 안된다거나 내 반쪽의 가정환경을 트집 삼아 반대했다. 이제서야 부모 역할해 보겠다고 그러는건지 결혼 허락을 하니 못하니 하며 실랑이하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엄마의 훼방이 내 반쪽에게 닿지 않게 차단했고, 어차피 부모의 보살핌 같은 거 모르고 살았으니 혼주석 없이 결혼하겠다고 결혼식에 오지 말라 했었는데 그건 싫었는지 끝내 수긍했지만 말이다. 어차피 친정에서 10원 한 장 받지 않고 결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엄마의 말을 무시할 수 있었다. 다행히 시댁에서는 나의 이러한 가정사를 다 알면서도 품어주었고, 어떻게 친엄마가 그러냐며 맘고생 많이 했겠다고 엄마처럼 생각하라며 보듬어주었다. 결혼식에 보탤 돈이 없는 나에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그저 아들과 예쁘게 행복하게 살라고 하셨다.
무사히 결혼식을 치르고 나서 신혼여행 갔다 와서 친정을 먼저 방문했다. 축의금 장부를 보여달라고 내 친구들이 낸건 달라했더니, 돈이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친구들이 내게 준 축의금들은 장부로 기록만 남아있을 뿐, 결혼식 정산하고 필요한데 쓰고 나니 돈 남은 게 없다며 주변에서 이래저래 빌려 100만 원을 만들었다고 내게 봉투를 쥐어줬다. 그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이젠 하다못해 내 앞으로 들어온 축의금마저 그렇게 쓰냐고. 일주일 동안 대체 뭘 하면 400만 원에 달하는 내 축의금을 한 푼도 안 남기고 쓸 수 있는 거냐고. 내 결혼식에 혼주자리 꿰차고 앉아있었던 이유가 돈이었냐고 분노에 차 소리쳤고, 다음 날 아침 바로 시댁으로 가버렸다. 한편 시댁에서는 내 반쪽 앞으로 들어온 친구들 축의금을 장부와 금액을 딱 맞춰 봉투에 넣어두신 걸 건네주셨다. 다 나중에 돌려줘야 할 빚이라며, 잘 넣어두라고 하셨다. 울컥했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부모님이 있는 내 반쪽이 부러웠다. 시부모님한테 감사해서라도 예쁘게 잘 살겠다고 다짐했고, 결혼 후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어머니는 내게 친정엄마보다 더 친정엄마 같은 나의 엄마가 되어주셨다.
어차피 이런 내 개인사를 일부러 읊을 필요는 없으니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다. 그래도 부모인데, 어떻게 부모한테 결혼하고서 연락 한 번 안 하고 살 수 있는 거냐고. 안 보고 싶냐고. 사랑받고 자란 사람들은 이해 못 할 테지. 부모라고 다 같은 부모가 아닌 것을. 세상의 모든 부모가 모성애와 부성애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저 자식은 도구이며 소유물일 뿐, 그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모를 테지. 나도 내 부모를 미워하고 싶진 않았다. 이해해보고 싶었다. 나이가 들면 이해하게 된다는 어른들의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수록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엄마 나이가 되었을 때 나도 그 힘든 일을 겪은 내 딸에게 "더러워"라는 말을 할까? 생각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절대 그런 매정한 말은 하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무섭고 두려웠던 만큼 실컷 울어도 된다고 품어줬을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엄마의 나이가 되었을 때도 생각했었다. 술 먹고 들어오면 늘 나를 때리고 갖은 도구로 패던 아빠를 안 말렸을까? 난 말렸을 것이다. 내 딸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 교복이 피범벅이 되거나 피멍이 들고 탈골이 되고 맞은 부위가 부어오르는걸 마냥 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맞으며 같이 싸웠을지언정 내 새끼를 때리게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가 쓰러졌을 때의 엄마 나이가 되었을 때도 생각해 봤다. 내 딸이 꿈을 포기해야 했을 때 그냥 피아노를 홀랑 팔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라도 두어 마음을 달래라 했을 것이다. 포기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미성숙한 아이의 목표가 사라지는 것을 당연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속에 한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부모가 완벽하지는 않다지만, 난 내 부모를 나이 들수록 그때의 내 부모의 나이가 되어 생각해 봤을 때 더욱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다.
그럼에도 난 내 부모를 만난 걸 후회하진 않는다. 예전엔 왜 내가 이렇게 태어나야 했었나. 난 왜 태어났나 하며 원망했었다. 원망의 깊이만큼 내 존재가 초라해져갔다. 나를 지키려는 방어기제같이 튀어나온 원망이 되려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야했다. 적어도 내가 나를 괴롭게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라도 나를 소중히 여겨야했다. 그게 아니라면 누가 나를 존중해주겠는가.
생각을 바꿔갔다. 오히려 순탄하게 살았다면 다른 번뇌가 생기지 않았을까. 힘들게 살아왔기에 한눈팔지 않고 나름대로 바른 길로 걸어와 반쪽을 만나지 않았는가. 다시 태어나도 똑같이 지금의 엄마아빠한테서 태어나 내 반쪽을 만나서 살 것이다. 선택권이 있다면 말이다. 나의 삶이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것으로 믿고 있다.
어린 날에 살아내야 했을 때는 삶이 괴로워서 놓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때를 견뎌내고 더욱 더 단단해졌다. 내게 주어진 것 이외에는 탐내거나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남이 가진 것에 대해 욕심을 내는 순간 나 자신은 비참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굴 부러워하거나 동경하는 감정을 철저히 차단하며 살아왔다. 최선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으로 인해 발생한 기회비용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렇게 선택해야 할 것이었으므로.
내가 선택한 내 반쪽은 인생에서 제일 잘한 선택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자상하고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지 세상은 살고 볼 일이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꼽으라면 제일 먼저는 나의 반쪽이고, 그 다음으로는 반쪽을 훌륭하게 키워주신 엄마를 말할 것이다.
그런 나의 반쪽과도 마냥 좋은 시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래를 대비하는 관점에 대해서 다른 부분에서 초반에 많이 싸웠다. 서로의 가정환경에 의해 결정지어진 성향은 정반대였다. 나의 반쪽은 최악의 상황이 생길 것을 생각하고 대비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난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아가며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많이 겪어 본 나였기에 최악의 순간을 생각하면 너무나 괴로워 오히려 헤쳐나가야하는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힘들어하는 나였기 때문이다. 최악을 생각하고 대비하느냐, 현재에 충실한 오늘을 쌓아 올려 원하는 미래를 만들 것이냐. 결국 둘 다 미래를 꿈꾸는 방향은 같지만 방법이 다를 뿐이었는데 그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서로를 이해하고 난 후에는 서로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보완해 가며 조금씩 미래를 그렸고, 그렸던 미래에서 현재 살고 있고, 또 다시 미래를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