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토피아
나는 계속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일에 욕심이 많은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프로젝트가 끝나고 쉬고 있으면 다음 프로젝트를 찾아서 가야하는 그 불확실성에 불안감을 느낀다. 그 불안감을 최대한 덜 느끼기 위해 일을 쉬지 않고 하려 했다. 늘 한 푼이라도 계속 벌어야 살 수 있었던 삶을 살아와서 그런지 쉬고 있으면 꼭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 같고 불안을 못 이기고 괴로워했다. 결혼 후 직업을 바꾸고 12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난 쉬는 것이 불안하고, 계속 쓰임있는 사람이고 싶은 생각에 일을 갈구하고 있다. 반쪽이 프로젝트 끝나고 고생했으니 쉴 땐 푹 쉬라고 말해도, 돈을 벌어 모아놓고도 돈 한 푼이라도 쓸까하면 죄책감이 들었다. 일하지도 않는데 돈을 쓰면 어떡해 라는 죄책감과 강박. 그것이 늘 날 옭아매는 탓에 스스로 채찍질하며 일하고 있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불안과 강박은 결국 현재 평범해진 일상과 평온한 미래를 갈구하는 나의 일그러진 접근방식이 아닐까.
나의 반쪽은 나와는 다르게 40대 중반을 달리다보니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 은퇴가 빠르지 않은가 싶지만, 요새 모든 직장인이 그렇듯 개발자 역시 수명이 길지 않다. 젊고 뇌지컬이 좋은 친구들이 끊임없이 들어온다. 그 속에서 노련한 개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개발도 물론 잘해야하지만 팀원 관리도 잘 해야 프로젝트가 잘 돌아가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개발에는 늘 기한이 정해져있고, 정해진 기간 내에 개발 완수를 해야한다. 또한 시스템에 장애가 있거나 이슈사항이 있을 때는 주말이어도 거뜬히 출근해야하며, 야근할 때도 심심치않게 있다. 몸을 갈아넣어 일하고 있으니 힘들긴 하니까 이제는 건강을 챙겨가며 살고 싶다며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나의 반쪽이 내게도 이따금씩 물어본다.
"자기의 꿈은 뭐야? 은퇴하면 뭐하고 싶어?"
"나? 난... 평범하게 지금처럼 사는 거."
"평범한거?"
"응, 먹고 싶은게 있으면 사 먹을 수 있고, 바람쐬러 가고 싶으면 바람쐬러 갔다올 수 있는 것. 그리고 또..."
"또..?"
"정년퇴직하는거."
"개발자한테 정년퇴직이 어딨어."
"60세 넘게도 일해보고 싶어. 젊고 개발능력있을 땐 개발자로 살고, 나이 들어선 관리자로 전환해서 PM도 해보면 되지. 나이들어서도 직장생활을 끝까지 해보는게 꿈이야."
그토록 내가 원하는 평범한 삶은 무엇인가.
결혼 전 혼자 살 때, 퇴근 후 자취방으로 걸어가는 길에 수많은 음식점들을 지나가며 보면, 그 음식점 안에서 저마다 사람들과 같이 음식을 나누고 얘기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바라보면 부러웠다. 매일매일 쓸 돈을 정해놓고 써야하는 빡빡한 생활을 해야했기 때문에 퇴근 후 누군가와 마주앉아 사담을 나누며 맛있는 것을 먹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더 그러했다.
엄마 빚과 학자금 대출을 갚고 나면, 먹고 사는 기본적인 비용조차 힘겨웠기 때문에 옷은 당연히 사 입을 여유가 없었다. 겨울을 제외한 봄여름가을엔 외투가 없었고, 겨울부터 초봄까지는 기모가 들어간 바람막이 하나로 버텼다. 겨울에 패딩을 입고, 봄에는 예쁜 자켓 그리고 가을엔 코트를 입어보고 싶었다. 늘 두세벌의 같은 옷을 돌려 입어가며 살았다. 바다를 보러 부산을 가고 싶어도 KTX 비용과 숙박비를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럴 돈이 있다면 제일 먼저 쌀을 사야했고 겨울 외투가 필요했다. 그러나 겨울엔 난방을 틀어도 전혀 단열이 안되는 집이어서 가스 보일러를 틀어도 실내온도가 14도 15도 남짓이었는데, 도시가스 고지서를 보면 20만원이 훌쩍 넘어 허덕였으니 옷 따위는 살 생각을 못했다. 도시가스요금도 다 내지는 못하고 늘 모자라게 냈던터라 독촉장이 날아들기를 반복했다. 우편함에 꽂힌 독촉장 고지서 재중 이라는 빨간 글씨가 적힌 봉투들을 보기가 두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돌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버텨야했다.
돈이 부족해 회사를 안가는 주말에 아르바이트라도 하려고 사람을 구하는 가게에 이력서를 내밀면 주중에 일하는데 주말에도 일할 수 있냐고 회사나 열심히 다니라는 말을 들으며 거절당하기 십상이었다. 또한 이러한 고민을 회사 사람들한테 얘기하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덜 힘드냐며 하고있는 일에 집중하라고 했다. 그래서 패스트푸드점이나 커피숍에서 주말에 알바하는 사람들을 봐도 부러웠다. 돈이 모자란 나는 주말에라도 알바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기엔 평범해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내겐 허락되지 않았다. 주말에 계절을 느끼며 나들이를 가보고 싶어도 그럴 돈이 없었다. 차비를 더 써서는 안됐다. 출퇴근 교통비까지 딱 비용을 맞춰놓고 썼기 때문에 돈을 쓰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천변이나 집 근처가 아니면 마음 먹기가 어려웠다. 돈을 덜 써서 겨울철 난방비나 생활비 등 살아내는 것을 대비해야했다.
내게 평범이란, 아침에 고시원의 작은 창문이 아닌 큰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며 눈 비비며 일어나고, 출근해서 장렬히 일하다 퇴근해서 피곤하더라도 나의 반쪽과 맛있는 저녁을 나누고, 나란히 손 잡고 강아지 산책을 가는 지금의 일상이 아닐까. 또한 계절마다 꽃 구경, 단풍 구경, 눈 구경하러 근교에 나가기도 하며, 기념일이나 기분 내고 싶은 날엔 맛있는 것을 사먹으며 웃음짓는 것. 그리고 걱정없이 집에서 시간을 즐기며 틈틈히 책 읽는 것. 주말에 집에서 우리 강아지를 한없이 예뻐해주고 놀아줄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을 지켜내는 것이 내 인생에 있어 중대한 사명인 것만 같다.
현재 지금 이 시간, 내게 주어진 삶을 충분히 즐기며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것. 그것이 내가 꿈꾸는 현재이며, 나의 유토피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