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힘든 순간, 생애 첫 독립

혼자 남겨진다는 것.

by 낭만

엄마아빠는 나를 신경 쓰지 않아도 어른들한테 잘하고 예의 바르니 잘 크는 걸로 생각해서일까. 나의 학교생활에 무관심했다. 학부모 참여 수업이나 상담이 있을 때면 다른 친구들 부모님은 교무실에 선생님과 함께 앉아 자신의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지내는지, 수업시간에 참여는 잘하는지 등의 관심을 표출하고는 했는데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아빠는 늘 일이 바쁜 탓에 무관심했고, 엄마 역시 나는 말썽 피운 적 없는 아이였으니까 알아서 잘하겠지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내 학교생활을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학교에 찾아온 적이 없었다.


학기가 끝날 때 즈음이면 성적표를 집에 가져가서 사인을 받아와야 했던 시절이었다. 성적표가 나오는 시즌이면 선생님이 성적표를 등 뒤에 숨기고 반에 들어오기라도 하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도 반 아이들 입에서는 "아~~~" 하는 탄성이 나오곤 했었는데 그 이유는 집에 성적표를 들고 가서 사인을 받아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한테 혼날 생각에 울상인 아이들도 있었고, 성적표 안 나왔다고 다 같이 거짓말 하자며 작당모의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그것이 공포였겠지만 그렇게 무서워하는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다. 친구들은 엄마아빠한테 혼날 생각에 한껏 가라앉아있었지만, 난 그런 공감대조차 형성하지 못했다. 잘했던 못했던 어떤 성적표를 가져다주어도 고생했다거나 성적 왜 이것밖에 안 나왔냐 등의 말 한마디 듣지 못했다. 그저 그랬구나 같은 시큰둥한 답만 돌아왔다.


학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봐주길 바랐다. 친구들하고 있었던 일도 물어봐줬으면 했다. 나도 집에 가서 재잘재잘 참새처럼 짹짹거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짹짹거리고 나면 돌아오는 반응은 밥 먹으라였다. 난 집에서 그저 밥 먹어야 하는 사람이었던 건가. 늘 뭐 말하려 하면 밥 먹으라 했다. 그 외엔 전혀 정서적 공감대가 없었기 때문에 엄마아빠가 다 있는 온전한 가정이었지만 외로웠다. 학교에서 친한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였지만 학교에서보다 집에서의 내가 더 외로웠다. 엄마아빠가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도 자식이니까 부모한테 관심받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아이들이 왜 삐뚤어지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나쁜 짓을 하면 나한테 관심은 좀 줄까? 그러면 나에 대한 무관심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나도 삐뚤어지고 싶었지만 삐뚤어지기에는 겁이 너무 많았다. 담배를 피워보고 싶어도 난 어린데 담배를 어떻게 구하지 라는 걱정이 앞섰고, 동네 꼬마애들한테 코 묻은 돈이라도 뺐어볼까 싶어도 "돈 내놔"라고 말하지 못했다. 기가 세 보이는 무서운 언니를 연기하기엔 쫄보였던 나는 꼬마 아이들 앞을 가로막고 설 용기도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중인 1월에, 우리 가족은 간신히 퇴원한 아빠와 함께 친척들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뇌출혈로 인해 뇌병변 장애를 얻은 아빠와 병원 가기 편하게 병원과 가까운 지하철역 근처로 집을 구해야 했다. 지하철역이 가까워질수록 월세도 가격이 꽤 비쌌기 때문에 돈이 없었던 우리는 작은 빌라 2층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큰 방 하나와 사람 한 명 간신히 누울 수 있는 작은 방 하나. 그리고 그 방 옆에 한 평 남짓한 주방엔 싱크대가 겨우 들어와 있는 아주 작은 집이었다. 지하철이 가깝다는 것은 도로변과도 인접해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사를 하고 보니 그것이 문제였다. 뇌병변 장애로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아빠는 섬망 증세가 있는 사람처럼 자꾸 문을 따고 나가 도로변을 배회했다. 엄마가 잠깐이라도 나갔다 왔다 하면 아무리 문을 잠그고 나가도 아빠는 몸의 오른쪽이 반쯤 마비되어 반신을 질질 끌면서라도 찻길 옆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엄마는 아빠를 찾기 위해 동네를 빙빙 도는 날이 늘어났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사간지 3개월 만에 다른 곳으로 또 이사를 가야 했다.


그때 난 고등학교 3학년 1학기가 막 시작하여 친구들 얼굴을 익히고 이름을 외우고 적응하던 4월이었다. 개학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때였는데, 엄마는 날 또 전학시키려 했다. 이번엔 대도시에 위치한 병원에서 차 타고 30분 정도 걸리는 시골지역으로 이사 가려했기 때문이다. 경치 좋고 길도 안전하고 월세도 저렴하다는 게 이유였다. 원래 살던 지역을 떠나온 데다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나의 진로를 다시 고민을 해야 했기 때문에 힘들었다. 게다가 전학을 왔기 때문에 한창 적응 중이었고, 새로운 환경과 아이들과 새로운 선생님 등등 모든 것이 낯설던 시기였다. 그런데 다시 또 전학을 가라니. 싫었다. 나 좀 생각해 달라고 그냥 엄마가 좀 더 아빠를 신경 쓰면 안 되는 거냐고. 나 전학 와서 개학한 지 이제 한 달인데 어떻게 또 전학 가라고 하냐고 속상해서 소리쳤다. 내가 아무 데나 데려다 놓으면 사는 똥개도 아니고 어떻게 고3인 나를 이렇게 무심하게 대할 수 있냐고. 그렇게 엄마와 한동안 며칠을 실랑이한 결과는 참담했다.


"그럼 너 혼자 살아."




그렇게 정말 나 홀로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 근처 고시원에서 혼자 살게 되었다. 원룸 얻어줄 돈이 없으니 엄마는 학교 근처 고시원에 나를 넣었다. 창문 한 칸이 없었다. 고시원 총무 사무실을 지나 들어가면 큰 복도가 있는데, 이 복도를 중심으로 좁은 복도가 4갈래로 나눠져 있었다. 그리고 그 복도를 사이에 두고 한 평 남짓한 방들이 촘촘히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내 방이었다. 문을 열면 바로 책상이 있고, 책상과 연결된 장에는 티비와 냉장실 한 칸만 있어서 500미리 생수병 몇 개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크기의 아주 작은 냉장고가 있었다. 그리고 그 티비장 앞으로 작은 싱글 사이즈의 침대가 있었고 그게 다였다. 침대 옆에는 책상 의자를 간신히 뺄 수 있는 정도의 공간만 존재했다.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불을 끄면 너무나 깜깜했고, 그 어두움이 무서워 티비를 켜고 자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또르르 흐르기도 하고, 학교 갔다가 고시원에 들어오면 우울해져서 해를 보기 위해 밖에 나갔다 오기도 했었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창 밖으로 보는 것도 평범한 일상 중 하나이며 소소한 행복인데, 내겐 그런 일상을 누릴 권리가 없었다.


내가 고시원에 사는 것은 금세 소문났다.


"쟤네 엄마아빠 이사 갔다며? 쟤 혼자 놔두고?"

"그럼 입시 설명회나 대학박람회는 어떻게 가려고?"

"너네 엄마는 그럼 담임선생님 상담 안 와?"


전학을 와서도 난 관심 대상이 되었다. 내가 전학 간 학교는 명문까진 아니지만 나름 공부 꽤나 하는 아이들이 많은 학교였다. 고3들은 학교 수업이 4시에 끝났고, 야간자율학습은 정말 말 그대로 자율적으로 남아서 공부하는 것이었고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수는 적었다. 하교 시간이 되면 학교 앞엔 학원 셔틀버스가 즐비했고, 부모님들이 과외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픽업 오는 차들로 가득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줄지어 학원 셔틀버스에 오르거나 부모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에 올라타고 어디론가 공부하러 떠났고 난 늘 혼자였다.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았고 심지어 전화조차 오지 않았다. 한 번은 엄마한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서 전화를 했었다.


"엄마, 엄마는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안 궁금해?"

"너 학교 잘 다니고 있는데 뭐."

"아니, 그게 아니라.. 나 걱정 안 돼? 나 안 보고 싶어? 왜 전화 한 번도 안 해?"

"보고 싶으면 자식이 전화해야지. 내가 전화해야 하냐?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어. 끊어!"


이런 식이 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 모두가 사라지고 혼자 남은 교문 앞에서 엉엉 울었다. 나도 내 입시에 신경 써 주는 부모가 필요했다. 나의 앞날을 함께 고민하고 응원해 줄 부모가 필요했다. 입시 용어가 너무 어려웠다. 설명해 줄 사람이 없었다.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엄마가 더 잘 알고 자기는 잘 모른다고 하거나, 그런 정보 또한 경쟁력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물어보는 나를 경계했고,나중엔 물어볼 엄두조차 안 났다. 그저 문맥상이나 상황상, 정황상 이런 의미인가라고 유추해 가며, 귀동냥으로 들어가며 터득했다. 지금이야 유튜브도 있고, 인터넷도 정보도 넘치는 세상이라 무엇이든 알아볼 수 있지만 그땐 그렇지 못했다. 담임선생님한테 물어보고 싶어도, 담임선생님은 그런 나를 안타까워할 뿐, 학부모 상담과 수업준비에 늘 바빴고 나 같은 학생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부모의 관심으로부터도 독립했고,

내 부모를 향한 마음으로부터도 독립했다.

단단하다 못해 딱딱해졌다.

야무진 게 아니라 독해졌다.

죽지 못해 겨우 살아가며 외로움과 싸웠다.

고독 속에 나를 가뒀다.악착같이 살아냈다.


그렇게 난 독립하고 있었다.

지독하고도 쓸쓸하게.

이전 08화사라진 피아노와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