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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향노루 Dec 28. 2019

현재는 과거와의 공존이다

[사향노루의 City Profile] 런던, London

*경험적 오류, 편견에 의한 오류 등 비객관적 내용을 다수 내포하고 있음


런던은 서울과 안산을 제외하고 태어나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도시다. 세 번의 여행으로 약 4주를 머물렀다. 어학연수라도 가본 사람들이 들으면 콧방귀가 절로 나올 기간이지만, 순수하게 여행자로서 한 도시에 4주를 머문 것은 그래도 꽤나 레어한 경험일 거라 자부해본다. 런던 정도라면 시티 프로필의 시작으로 적당할 거란 생각이 든다.

NIKON D80 +  AF-S DX Nikkor 18-55mm F3.5-5.6


처음 런던에 발을 내디뎠던 때를 기억한다. 나는 전역한 지 고작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직 짬내가 덜 빠진 반군바리였고 심지어 태어나서 처음 한국이 아닌 곳에 나온 촌놈이었다. 상상해보라. 이런 사람에게 런던이라는 거대하고 유서 깊고 누가 봐도 유럽인 도시가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지.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고,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런던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강렬했다.


NIKON D80 +  AF-S DX Nikkor 18-55mm F3.5-5.6


사실 런던이 그렇게 살기 좋은 도시는 아니다. 엄청난 물가와 집값을 자랑하며 중심가는 매일매일이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서울의 집값과 중국인, 일본인에게 점령당한 명동을 생각하면 쉽게 그 느낌이 와 닿을 것이다.(상대적으로 따져보면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절대적 기준에서 런던의 부동산 시장은 서울의 그것을 한참 초월한다.) 하지만 그 수많은 여행객들의 목적이 서울을 찾는 중국인들처럼 바리바리 면세쇼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런던이란 도시가 여행자에게 얼마나 매력적인 도시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NIKON D80 +  SIGMA 17-70mm F2.8-4 DC MACRO OS HSM


런던이 가진 의외의 매력을 꼽자면 저렴함이다. 앞서 런던의 살인적 물가를 지적했는데 박물관과 미술관들의 대부분이 무료 개방되고 있어 밥값, 숙소비, 교통비만 쓰는 여행 코스를 짤 수 있을 정도다. 실제로 2009년 첫 여행 때 2주를 머무르면서 밖에서 쓴 돈은 한두 번의 식사비와 몇 번의 음료 구매 비용, 기념품 구매 비용뿐이었다. 물론 그 당시 이용했던 런던 한인민박이 점심과 저녁을 모두 제공한 덕이기도 했지만, 런던의 한인민박 물가는 치열한 경쟁 때문에 여전히 타 도시에 비해 저렴한 편이라는 것도 장점이다.


NIKON D80 +  SIGMA 17-70mm F2.8-4 DC MACRO OS HSM


그래도 의외의 매력은 어디까지나 곁다리일 뿐이다. 런던은 둘러볼 것이 정말 넘쳐난다. 개인적으로 적지 않은 외국 도시를 돌아다녔다고 자부하는데, 런던만큼 구경거리가 넘쳐나는 도시는 없었다. 그렇게 잘난 체를 하는 바르셀로나도 솔직히 런던에 비하면 양과 다양성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들, 수백 년을 버텨온 역사적 건축물들, 런던의 현대적 풍경을 만드는 감각적 빌딩들, 다양한 문화 등 하나하나 나열하자면 이 글은 끝이 없는 글이 될 게 분명하다. 굳이 자세히 이야기하기엔 너무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NIKON D80 +  SIGMA 17-70mm F2.8-4 DC MACRO OS HSM / PANASONIC LUMIX LX7


특히 그런 런던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그 많은 둘러볼 것들이 지닌 밸런스와 조화다. 이 낯선 동양인 여행자의 눈에 런던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함과 오래된 것을 아낄 줄 아는 온건한 보수성이 절묘하게 조화된 도시였다. 그 양면적 성향이 런던을 다채로운 도시로 만들었다. 트라팔가 광장의 다른 동상들 사이에 은근슬쩍 서있는 현대미술 작품,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장인의 방식으로 핸드메이드 슈트를 만드는 세빌 로와 현대 패션 산업의 산물들이 모여있는 리젠트 스트리트가 나란히 서있는 모습, 세인트 폴 대성당을 압도할 방법이 아니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고민한 원뉴체인지 등은 새로운 것이 꼭 과거의 것보다 낫거나 돋보여야 함은 아님을 보여준다. 과거의 것이 새 것에 담겨있기도, 새 것이 과거의 것에 담겨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필요할 땐 뱅크 지역처럼 화끈하게 치장할 줄도 안다.


NIKON D80 +  SIGMA 17-70mm F2.8-4 DC MACRO OS HSM
PANASONIC LUMIX LX7


그들이 아낀 오래된 것은 조상들이 남긴 위대한 랜드마크들 뿐만이 아니다. 테이트모던이나 옥소타워워프처럼 굳이 남기지 않아도 될 산업 건축물까지 함부로 버리지 않고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시켰다. 런던의 대표 낙후 지역에서 런던 힙스터들의 집합소가 된 쇼디치 역시 겉으로 보기엔 전혀 힙하지 않고 여전히 후진 외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그 안을 채우는 것을 바꿈으로써 새로운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전문용어로는 ‘도시재생’이라고 하는데, 그런 딱딱한 용어는 선호하지 않는다. 바꾸지 않으면서 바꾸는 방법을 아는 도시라고 해야 하나? 웃긴 말이지만 실제로 그렇다. 재개발의 시작=파괴인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 눈에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NIKON D80 +  AF-S DX Nikkor 18-55mm F3.5-5.6 / NIKON D80 +  SIGMA 17-70mm F2.8-4 DC MACRO OS HSM


런던에서 만난 이 새로운 광경과 경험들은 나를 끊임없이 즐겁게 했다. 게다가 런던은 축구의 도시이기까지 하니 나에게 딱이다. 런던의 다양한 축구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축구팬으로서 축복이었다. 몰론 버스정류장에서 자전거 탄 프로 폰스틸러에게 핸드폰을 강탈당한 일까지 즐겁지는 않았지만 어디나 외국에 여러 날 있다 보면 언짢은 기억 하나 정도는 생기는 법이다. 그런 기억이 지배하기엔 런던이 나에게 준 재미가 너무 크고, 강렬한 추억이 너무 많다. 처음으로 만난 해외여행지로서 나에게 정말 많은 것을 선물했다.


NIKON D80 +  SIGMA 17-70mm F2.8 DC MACRO OS HSM


생각보단 추상적인 글이 됐지만, 런던에 대한 내 애정표현으로는 나쁘지 않지 싶다. 이렇게까지 썼는데도 최애는 아니란 걸 알면 런던이 어이없어 하겠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 또 런던병이 도지려 한다. 불치병이다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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