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의 성지'. 2015년, 베를린에 갈 생각으로 인터넷에서 베를린에 대해 검색했을 때 나온 정보였다. 베를린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생각하는 중에도 마시고 노는 이미지를 예상하진 않아서인지 상당히 의외긴 했다. 베를린... 어쩐지 근엄하고 고상하고 약간은 고지식할 것 같은 느낌은 나만 가지고 있었던 것인가?
NIKON D80 + SIGAM 17-70mm F2.8-4 DC MACRO OS HSM
주변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클럽은 물론 나이트나 한때 유행했던 ‘밤사’ 조차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스테이지가 있는 밤사에 딱 한 번 가봤지만 30분도 못 버티고 나왔다. 이제 슬슬 내가 베를린에서 그간의 인생 경험을 뒤엎는 광란의 클럽 썰을 풀 듯한 분위기지만 전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마주한 것이 이런 베를린의 대외적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 힙함을 언급해봤다. 맥거핀 효과 같은 거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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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로 보고 즐길 것이 풍성하다. 나 역시도 베를린에 머무르며 많은 것을 보았지만 무엇보다도 내 기억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은 도시 곳곳에 진하게 남아있는 독일 분단의 흔적들이었다. 그래서 이번 시티 프로필은 정확히 말하면 베를린의 프로필이라기보단 직접 목격한 분단과 통일의 흔적을 기록하는 것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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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베를린 장벽 중 주요 스팟들을 보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처음엔 어디까지나 틈틈이 들러보자는 수준이었다. 최종적으로 베를린 일정 2일차에 그 일정들을 모두 모았다. 아침에 베를린 관광 지도를 보며 갑자기 떠올린 아이디어였다. (일기는 참 좋은 기록인 듯하다. 일기를 확인하기 전까지 나는 훨씬 계획적으로 만든 일정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전날 베를린을 돌아다니며 2015년이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임을 알게된 게 생각의 씨앗이었다. 최대한 많이 돌아보려고 동선을 살펴보니 대중교통에 약간 빡신 도보를 혼합하면 일곱 곳의 주요 스팟을 하루에 순회할 수 있었다. 나는 이를 ‘베를린 장벽 투어’로 명명했다. 그날 내 일정을 물었던 한인민박 사장님은 "이런 일정을 짠 사람은 처음"이라며 신기해 했다. 네.. 제가 이렇게 이상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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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 역사의 가장 큰 치부인 나치와 2차 대전 흔적도 최선을 다해 보존하는 민족이니만큼 베를린 장벽이 도시 곳곳에 기념물로 존치돼있는 것은 당연했다. 어떤 장벽은 전철이 지나는 다리 아래 수풀 속에 무심하게 서있었고, 유대인 학대와 비밀경찰 게슈타포 활동 등 나치 만행을 기록한 박물관(토포그라피 오브 테러)이 함께 조성된 곳도 있었다. 공동묘지 안에 서있던 장벽은 마치 분단의 역사를 위한 비석 같았다.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 유일한 통로였던 체크포인트 찰리는 너무나 관광지화돼서 그 장소가 가진 가치에 비해 감흥이 전혀 없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는 독일인들의 예술적 감각과 위트를 느낄 수 있었다.
NIKON D80 + SIGAM 17-70mm F2.8-4 DC MACRO OS H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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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북역(Nordbahnhof)이었다. 사실 출발할 때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체크포인트 찰리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를 제외한 나머지 스팟들은 지도로만 확인했을 뿐 어떤 장소들인지 전혀 몰랐다. 그러다 보니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북역을 먼저 들르게 됐는데 이는 내 장벽 투어 일정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마지막이 됐으면 이 투어는 완벽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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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마주한 북역은 정말 놀라운 곳이었다. 동서독 분단 당시 유일하게 분단선에 걸쳐있는 역이고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양쪽으로 출구가 나 있어서 역 자체가 폐쇄되고 삼엄한 경비가 이뤄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분단의 흔적이 상당한 규모로 남아있었다. 역사 내부와 주변 곳곳 바닥에 당시 분단선이 금속띠로 표시돼있었고 감시탑과 장벽, 보조 철조망까지 당시의 실제 장벽 주변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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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된 장벽 옆에 조성된 기념관에선 분단 당시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이 있었다. 3층 전시실에선 장벽 붕괴 과정을 요약한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종전은 원하지만 통일은 경제적, 문화적 이유로 반대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 다큐를 보며 내가 눈물을 흘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역사적인 남의 일’ 정도로 생각했는데 고위 관계자의 ‘실언’으로 동서독 주민들이 체크 포인트 찰리로 몰려가 넘어가게 해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문이 열리자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넘어가 환호하는 장면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강렬한 감정을 선사했다. 그때 처음으로 ‘우리도 통일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한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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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 보면 간혹 예상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받고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베를린으로 향하며 기대한 건 멋진 건물들과 박물관, 맛있는 베를린 맥주였고 그것들을 모두 만났다. 사람들, 음식들, 즐거움들… 한동안은 그런 것들도 또렷하게 기억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 기억이 너무 흐릿하다. 사진을 봐야 겨우 생각난다. 하지만 의외로 얻은 강렬한 경험과 감정은 시간이 계속 지나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지금도 베를린 여행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장벽 투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여전히 높고 단단하지만 통일의 상징이 된 분단의 상징을 바라볼 때 느낀 그 놀랍고 복잡한 기분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