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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향노루 May 15. 2020

Peaceful Thought

[사향노루의 City Profile] 더블린 & 아일랜드 Ireland

“회의실에 모여봐.” 팀장님의 그 한 마디가 이 여행의 시작이었다. 2017년, 그 해는 징검다리 연휴가 유독 많았고, 팀장님은 첫 번째 징검다리 연휴를 앞두고 네 명의 팀원이 황금연휴를 하나씩 나눠가지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순간, 눈 앞에 예수가 재림한 것인가 싶었다. 그리고 팀원들은 나에게 한 번 더 은총을 내려줬다. 여자친구가 어학연수를 가 있으니, 제일 긴 4월 말~5월 초 황금연휴를 내가 써서 다녀오란다. 사회화된 인간의 이타성을 무한하게 체감한 날이었다.


그렇게 연차 3일을 써서 11일의 휴가가 생겼다. 런던에서 여자친구와 접선해서 4일을 즐겁게 보낸 후 어학연수 중인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넘어갔다. 사실 아일랜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토트넘의 간판이었던 로비 킨, UFC를 뒤흔들고 있던 코너 맥그리거가 아는 아일랜드 사람의 전부였다. 아, 영화 원스와 싱스트리트도 있네.


iPhone 6 Plus - 버스 터미널같이 친근한 더블린 공항....


여자친구는 더블린 공항이 작으니 놀라지 말라고 말했다. 그래도 한 나라의 수도인데, 더블린에 공항이 여러 개도 아니라는데 너무 과장한다 싶었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문이 열렸다. 게이트는 없고 계단을 통해 땅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공항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걸어서… 공항 건물로 이동했다. 두 가지를 의미했다. 이 공항은 절대 큰 공항이 아니며, 공항 건물 밖에서 철저한 동선 통제가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운항 스케줄이 빡빡하지도 않다는 의미였다. 지정된 구역에서 내려서 버스로 실어 나르느니 착륙 후 비행기를 터미널 가까이로 운전해서 내려주고 돌아가는 게 나은가 보다. 공항 특유의 웅성웅성하는 소리도 없고, 입국 심사대도 대여섯 개뿐이고 그나마 심사 중인 게이트는 세 개뿐이다. 지금껏 다녀본 국제공항 중 입국에 걸린 시간이 가장 짧았다. 소박하다 이 나라. 근데 뭔가 싫지 않다.


짐을 방에 두고 중심가로 나왔다. 번화가 느낌이 난다. 하지만 여느 여행지들처럼 번잡한 느낌은 아니다. 관광객도 있고 더블리너들도 있는 듯 하지만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생김새는 영국과 비슷한데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iPhone6 Plus - 초록의 나라, 아일랜드


그녀는 중심가에서 딱히 갈 곳이 없다며 난감해했다. 고풍스러운 건물이 그나마 볼만하다며 트리니티 대학교 캠퍼스로 데려갔다. 정말 유럽 대학같이 생겼다. 주위를 둘러보니 길보다 초록초록한 잔디밭이 더 넓다. 다들 잔디밭에 앉거나 누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점심으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은 가게에서 부리또볼을 사서 공원으로 간다. 이름이 ‘세인트 스티븐스 그린’이란다. 이름처럼 초록초록하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잔디밭에 앉거나 누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동네, 평화롭다.


Nikon D80 + SIGMA 17-70mm F2.8 DC MACRO OS HSM


더블린에서 버스로 한 시간 이내 거리에 바다가 있다. 호스(Howth). 아일랜드를 갈 때부터 호스를 가고 싶었다. 영화 싱스트리트를 통해 보고, 그녀를 통해 전해 들었던 호스의 아름다운 풍경… 하지만 기대와 달랐다. 대단하게 아름다울 건 없다. 대신 여기도 평화롭다. 사람들은 있지만 북적이는 건 아니다. 갈매기는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까지도 다가갈 수 있다. 항구에 정박한 어선들 사이에서 물개가 고개를 내밀고 사람들과 눈을 맞추다 물 속으로 사라진다. 언덕으로 올라가 봤다. 해안선을 따라 오르는, 꽃들이 펼쳐진 야산 정도 높이의 언덕이다. 호화롭거나 웅장한 풍경은 없다. 바다에도 특별한 것은 없다. 경이로운 자연에 압도될 일도, 감동적 풍경에 벅찬 가슴을 부여잡을 일도 없다. 그저 편안하게 평화롭게 산책을 즐기고 바람을 느끼고 바다를 바라보다 돌아서면 되는 것이다.

Nikon D80 + SIGMA 17-70mm F2.8 DC MACRO OS HSM - 한국엔 비둘기, 호스엔 갈매기
Nikon D80 + SIGMA 17-70mm F2.8 DC MACRO OS HSM


이번엔 아일랜드섬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갔다. 최고 높이 214m의 해안 절벽, 파멸의 절벽이라는 뜻의 클리프스 오브 모허. 이 웅장한 풍광을 즐길 수 있는 날보다 비, 강풍, 안개 등 악천후로 바다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날이 더 많단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나라에 매료된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을까? 마치 ‘기왕 평화롭다고 느낀 거, 끝까지 평화롭게 있다 가라’고 하는 듯 모허 절벽은 연중 손에 꼽을 만한 수준의 온화한 날씨를 준비해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호스보다도 부드러운 바람만이 불어오는 그곳은 파멸의 절벽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잔잔한 대서양의 풍경을 보여줬다.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는 절벽 끝을 따라 걸어도 겁나지 않을 만큼 편안한 시간이었다.


Nikon D80 + SIGMA 17-70mm F2.8 DC MACRO OS HSM
Nikon D80 + SIGMA 17-70mm F2.8 DC MACRO OS HSM

사실 걱정이 많았다. 어쩔 땐 나보다도 철두철미하지만 어쩔 땐 바보 같다 싶을 정도로 순진한 그녀가 혼자 타국에서 무사히 9개월을 보내고 올 수 있을지. 떠날 땐 다시 헤어지는 것은 슬펐지만 조금은 안심이 됐다. 이렇게 평화로운 곳이라면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되겠지 싶었다. 그 생각대로 그녀는 별다른 큰 일 없이 어학연수를 마쳤고 지금은 가끔 그때를, 더블린을, 아일랜드를 그리워하곤 한다.


iPhone6 Plus


더블린과 아일랜드에서 머문 시간은 매우 짧았다. 고작 3박 4일. 새벽같이 귀국길에 올랐으니 사실상 3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9개월 정도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 느낌이다. 더블린과 아일랜드의 그 풍경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색깔이 눈이 편안해지는 초록색인 걸까?


Nikon D80 + SIGMA 17-70mm F2.8 DC MACRO OS HSM - 모허절벽 가는 길에 들렀던 작은 마을 두린. 세상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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