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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향노루 May 10. 2020

베트남 커피의 반가운 ‘배신’

[사향노루의 City Profile] 호치민, Ho Chi Minh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의 기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미국빠, 유럽빠, 제3세계빠(동남아 포함). 나는 명백하게 유럽빠로 분류되는데 그런 내가 호치민을 세 번이나 갔다는 점은 참 의외다.


베트남에 처음 간 것은 2013년. 당시 아버지께서 회사의 베트남 공장 때문에 해외근무 중이셨고, 우리는 해외파견의 혜택으로서 주어진 ‘연 1회 가족 방문 지원’을 이용해 호치민으로 날아갔다. 다음 해에도 같은 혜택으로 한 번 더 호치민에 들렀다. 그리고 2018년에는 퇴사 후 멘 케어를 위해 먼 곳으로 떠나는 차원에서 호민에 머물렀다. 공교롭게도 이때 아버지께서 은퇴 후 친구를 만나고자 호민에 방문한 일정과 겹쳤다. 아버지와 특별히 뭔가를 많이 하는 타입의 가족이 아닌데 호치민의 히스토리만 놓고 보면 세상 잘 놀러 다니는 부자간 같다.


Panasonic Lumix LX7
Nikon D80 + SIGMA 17-70mm F2.8-4 DG MACRO OS HSM


사람들이 흔히 베트남을 생각하면 무엇을 떠올릴까? 아마도 호치민보다는 하노이, 나트랑, 다낭처럼 휴양과 여행으로 유명한 도시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호치민은 경제의 중심지고 역시 들으면 누구나 아는 도시기는 하지만 먼저 떠오르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만큼은 호치민이 가진 이미지가 베트남의 이미지다. 일종의 선점효과랄까?


호치민이 어떤 도시인지 정확하게 정의 내리기는 쉽지 않다. 나는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 방문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적절한 비교군이 없다. 비교하지 않고 호치민에 집중해본다. 호치민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는지 머릿속에 그려본다. 으음… 커피… 커피가 떠오른다.


Nikon D80 + SIGMA 17-70mm F2.8-4 DG MACRO OS HSM - 커피가 매우 진해서 얼음을 열심히 녹여야 한다.


베트남은 커피 산지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커피 산지로의 이미지는 없었으나(베트남 커피가 한국인들에게 인지되기 시작한 것은 멀지 않 과거부터다.) 꽤 오래전부터 브라질에 이어 전 세계 커피 생산량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커피란 무엇인가. 세련됨의 상징이다. 커피를 진지하게 즐길 아는 자는 어른이고, 문화를 향유할 줄 아는 사람이고, 섬세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고, 도시적이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우리나라에서는 그 사람이 어떤 커피를 먹느냐에 따라 사람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 쌉쌀함 속에 담긴 다양한 풍미는 매우 매력적인 맛이다.


그런데 베트남 커피 맛은 조금 다르다. 구수하다. 세련된 커피에 구수한 맛이라니. 커피를 상징하는 씁쓸한 맛은 온데간데없고 미숫가루를 연상케 하는 구수한 콩 향기가 입안을 가득 메운다. 이건 커피에 대한 배신이다. 처음 먹었을 땐 ‘이것도 커피인가?’싶을 정도로 깜짝 놀란다. 하지만 싫지 않다. 재밌다. 즐거운 배신이다. 이런 맛의 커피도 있을 수 있구나. 그 맛을 느끼기 위해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다 보면 어느새 바닥이다. 서구적으로 잘 다듬어진 형태의 브랜드로 갈수록 그 구수함이 약해지기는 하나 거기에도 다른 커피에서는 느낄 수 없는 구수함이 있다.


Nikon D80 + SIGMA 17-70mm F2.8-4 DG MACRO OS HSM - 호치민 시청 앞 광장


호치민이란 도시도 그랬다. 그 누구도 베트남을 세련된 나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가가 저렴하고, 위생적이진 않지만 동남아 특유의 정겨운 분위기가 있으며, 오토바이가 차보다 많은 시끄러운 도시의 모습을 상상한다. 사람들은 약간 촌스럽고, 우리나라의 70~80년대를 보는 듯한 분위기를 생각한다. 하지만 베트남은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고 호치민은 그 중심에 있다. 구수함만 생각하고 발을 들였다가 의외의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며 즐거운 배신감을 선물한다.


지금 호치민의 중심가는 한국의 번화가나 유럽 도시의 번화가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잘 정돈된 광장, 오페라 공연장, 명품 거리, 대형 백화점과 쇼핑몰 등이 눈을 사로잡는다. 수제 맥주를 즐길 수 있는 브루어리펍, 세련된 요리를 선보이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도 약간의 검색만 해보면 찾을 수 있다. 길가에 앉아 먹는 구수한 커피만 있는 게 아니라 오래된 건물을 재단장한, 성수동이 오버랩되는 세련된 인테리어의 카페에 앉아서 먹는 에스프레소도 있었다. 허름한 가게의 얇은 스테인리스 테이블에서 윗옷도 안 입고 앞치마를 두른 주인장이 건네주는 쌀국수를 먹는 것이 아니라 깔끔하게 꾸며진 체인점 안에서 흰 셔츠와 검은 바지 차려입은 점원이 내주는 쌀국수를 먹을 수 있다. 맛은? 똑같다. 어떤 면에선 더 잘 다듬어진 고급스러운 맛이기도 하다.


Nikon D80 + SIGMA 17-70mm F2.8-4 DG MACRO OS HSM - 동코이 거리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Vietnam House
Nikon D80 + SIGMA 17-70mm F2.8-4 DG MACRO OS HSM -  베트남 커피를 팔지 않는 베트남 카페


물론 어디에나 잘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춘 고급 서비스들이 있음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곳들을 둘러보며 느낀 것은 그런 서비스를 즐기는 사람들이 결코 그 나라의 일부 상류층들로만 보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가 재래시장과 백화점을 모두 다니듯 그들도 허름한 벤탄 시장과 으리으리한 사이공 센터를 모두 다닌다. 나와 비슷한 평범한 젊은이들이, 평범한 가족들이 나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택시를 타거나 걸어서 그곳에 갔지만 그들은 스쿠터를 타고 왔다는 점만 빼면.


Nikon D80 + SIGMA 17-70mm F2.8-4 DG MACRO OS HSM


호치민에서 다시 한번 느낀 것은, 편견은 말 그대로 편견일 뿐이며 실제의 형상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낭만과 아름다움을 상상했던 유럽에서 사기꾼들과 눈치게임을 벌이고, 핸드폰을 강탈당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호치민이 안겨준 것은 ‘즐거운 배신’이었다. 그렇게 호치민은 나에게 참교육을 시전했다. 기대와 상상을 하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그것이 편견에 따른 것이라면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이제 내 머릿속 호치민의 이미지는 확장됐다. 동남아만의 구수함과 한국 못지않은 세련됨을 모두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도시로. 꾹 누르면 휘어버릴 것 같은 커피핀에 내린 미숫가루 맛 커피와 어제도 스타벅스에서 즐긴 세련된 아메리카노 중 그 순간 더 땡기는 쪽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런 도시.


Nikon D80 + SIGMA 17-70mm F2.8-4 DG MACRO OS H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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