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브런치 글을 두어 개만 읽어봤어도 글쓴이가 논리와 팩트에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는 기괴한 인물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에게 비논리는 혐오의 대상이고 사실이 아닌 근거는 사회악이다. 좋아하는 것에도 싫어하는 것에도 뚜렷한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다.
그런 나의 뇌를 무장해제시키는 도시가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자리한 포르투갈의 리스본. 극동아시아의 팩트충이 지구 반대편에서 갬성에 허우적대는 모습을 공개하고자 한다.
NIKON D80 + AF-S DX Nikkor 18-55mm F3.5-5.6
예전에도 지금도, 왜 내가 리스본을 그렇게 가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다.(호날두…?) 여타 도시들과는 다르게 리스본에 대해서는 유독 아는 것이 없었고, 사진으로조차 딱히 접해본 기억이 없다. 많은 이들이 내가 “그냥 어쩐지 가보고 싶었다”라고 말하면 “리스본행 야간열차?”라고 되묻는 경우가 많았는데, 영화를 굉장히 많이 보는 편이지만 리스본행 야간열차만 두 번 타봤지 그 영화는 아직도 보지 않았다. (참고로 대학 시절에는 피렌체를 이야기할 때 ‘냉정과 열정사이’를 말하는 이들 많았는데 핵꿀밤을 한 대씩 먹이고 싶었다. 그곳에는 일본 로맨스 소설 감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NIKON D80 + AF-S DX Nikkor 18-55mm F3.5-5.6
누군가 나에게 지금까지 여행했던 곳 중 어느 곳이 제일 좋냐 물으면 나의 대답은 한결같이 리스본이다. 두 번을 다녀왔지만 앞으로 기회만 된다면 몇 번이고 가겠다고 답한다. 왜냐고 물으면 역시나 왜 가고 싶었냐는 물음을 받았을 때처럼 딱히 할 말이 없다. 기껏 머리를 쥐어짜서 했던 대답들 중 가장 그럴싸했던 게 “내가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인데, 사실 내가 무엇을 상상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떠오르는 행복한 기억들을 두서없이 한참 나열하다 “아무튼 좋아요”라고 마무리하며 웃는다.
NIKON D80 + AF-S DX Nikkor 18-55mm F3.5-5.6
언제부터 리스본을 좋아하게 됐는지 물으신다면 아마도 마드리드발 야간열차를 타고 리스본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라 답할 수 있을 듯하다. 더 정확히는 오리엔트 역에 잠시 정차했을 때부터 같다. 비좁은 6인실 침대칸에서 긴장감으로 선잠을 자며 보낸 하룻밤으로 찌든 나에게 창밖으로 보이는 청명한 하늘, 기하학적 구조의 반투명 플랫폼 지붕을 뚫고 슬며시 내리쬐는 따듯한 햇빛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천연의 에너지였고, 그 순간부터 팩트충의 뇌 구조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NIKON D80 + AF-S DX Nikkor 18-55mm F3.5-5.6
NIKON D80 + AF-S DX Nikkor 18-55mm F3.5-5.6
그래서인지 두 번째 여행에서는 모두가 의문을 가질 비효율적인 여정을 통해 리스본에 당도하게 된다. 첫 여행 때는 런던을 떠난 후 파리-낭트-마드리드 순서로 여행을 즐기며 리스본에 입성했는데, 두 번째 여행에서는 런던에서 곧바로 리스본으로 향했다. 육로로. 저가항공 등 비행기를 타고 가면 몇 시간이면 갈 곳을 굳이 야간열차를 이틀 연속으로 타는 기이한 루트를 선택했다.
물론 유레일 패스가 있었던 탓도 있고, 호텔열차 독실의 로망이 있었지만 세 번의 환승을 하는 동안 발생한 총예약비가 저가항공보다 비쌌음을 생각하면 내 방식에는 비용으로나 시간으로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점이 없었다. 내 일정을 들은 사람이 “왜 굳이 그렇게 가죠?”라고 물었을 때야 이를 깨달았고 나조차도 나를 바보 취급했다. 호텔열차에서 새벽녘 마주한 광활한 지평선의 일출을 생각하면 그만한 가치는 있었지만 그것은 생각지 못한 보상이었을 뿐이다.
NIKON D80 + AF-S DX Nikkor 18-55mm F3.5-5.6
NIKON D80 + AF-S DX Nikkor 18-55mm F3.5-5.6
리스본에서의 일정도 참 비효율 적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리스본이 구경거리가 아주 많지는 않다며 1~1.5일 안에 빠르게 핵심 스팟을 돌고 난 후 기차를 타고 포르투로 이동하곤 한다. 리스본을 애초에 거쳐가는 곳으로만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한없이 리스본에 붙어있고 싶었다. 하루 동안 근교의 신트라를 둘러본 것을 제외하면 오롯이 리스본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빼곡한 빨간 지붕, 타호강의 짠내 나는 바람, 정겨운 골목, 리스본 사람들의 미소가 너무 좋았다. 멋진 레스토랑을 찾지 않아도 넉넉한 인심 덕에 모든 식사가 즐거웠다.
NIKON D80 + SIGMA 17-70mm F2.8-4 DC MACRO OS HSM
사실 두 번째 여행에서 나는 리스본을 가지 못할 뻔했다. 런던 일정 막바지에 토트넘 홈구장을 가다 버스 정류장에서 자전거 탄 도둑놈들에게 핸드폰을 강탈당했다. 길바닥에서 연신 F워드를 외치는 소리에 그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왔다. 이런저런 말을 시키며 나를 진정시키고 경찰까지 불러준 덕에 그 순간에는 침착하게 신고도 마치고 시내로 나가 저렴한 보급형 폰을 구매해 상황을 수습했는데, 오히려 논리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들을 마치고 나니 갑자기 여행이 무서워지고 사람이 혐오스러워져 그대로 돌아올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내가 탈 버스 번호를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보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내 손에서 핸드폰이 빠져나가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봤고,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계속 아른거렸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리스본에 도착해 알칸타라 전망대 노천카페에 앉아 맥주 한 모금을 마시는 순간, 안도감과 행복감이 한껏 짓눌려있던 용수철처럼 터져 나왔다. 런던 다음 일정이 리스본이어서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PANASONIC LX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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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리스본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그녀의 어디가 좋은지 생각해보면 여러 이유가 떠오르지만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사랑할 거라 믿는 것처럼. 리스본이 좋은 이유, 리스본이 좋았던 순간에 대해 수십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그런 경험이 없었다고 해서 리스본을 좋아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 감정은 비논리의 끝인 ‘느낌적인 느낌’이고 근거가 모호하다. 전생에 리스본과 어떤 연관이라도 있나 싶은 생각이 들며 비과학의 한계점까지 치닫는다. 리스본 갬성은 내가 받아들이는 유일한 무논리다.
PANASONIC LX7
PANASONIC LX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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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에서 보낸 시간들을 합쳐봐야 겨우 10일 남짓. 하지만 나는 항상 리스본이 그립다. 마침 나의 강력한 추천에 포르투갈 여행을 경험한 내 곁의 그녀도 포르투갈을 사랑한다. 함께 리스본으로 떠나는 그날을 기다린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곳에서 함께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