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잊혀질 권리'라는 말이 가끔 귀에 들어온다. 오랫동안 우리는 이러한 권리를 누리지 못했고, 처음으로 그 권리가 주창될 때 우리는 낯설었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존재하지 않았을 뿐 그 필요성은 절실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지만 잊혀질 권리는 보통 유명인이나 특별한 일을 겪은 누군가에게 적용된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우리에게는 딱히 적용될 일이 없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그 권리가 절실한 순간을 마주하게 됐다. 퇴사다. 회사라는 조직은 잊혀질 권리가 말살된 곳이다. 재직 중 했던 업무의 기록들은 회사의 자산으로 내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오히려 잘 보존해서 타인에게 인계해야 한다. 그렇게 회사에서의 나의 행적은 모두 기록으로 남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전해지게 된다. 진짜 나는 사라지고 짜인 틀 안에서 제한된 선택지를 가지고 행동했던 나의 껍데기만이 남는다.
조용히 퇴사하고 싶었다. 퇴사 이후 남은 사람들에 의해 마음대로 각색되는, 사라진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보았다. 그들에게 변론의 기회는 없다. 남은 사람이 마음대로 말하고 표현하고 평가하면 그것은 진실이 된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잊혀지고 싶다. 남은 사람들 사이에 도는 좋은 이야기?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어차피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먹잇감을 상기시켜주는 계기가 될 뿐이다. 함께 일하고 의지하던 사람들에게도 이런 바람을 넌지시 표현하기는 했는데,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나라는 사람만 기억하고 'OOO팀의 XXX 대리'는 잊혀졌으면 좋겠다. 후자의 기록만이 남아있는 곳에서 이런 바람을 가지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꿈일 것이다. 그래도 한 번 희망해 본다. 이효리가 말하지 않았는가. 가능한 것만 꿈꿀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꿈이니까 한도 끝도 없이 바랄 수 있는 거 아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