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도 종종 속마음을 드러낸 바 있지만, 나는 시그마빠 매니아다. 디지털 카메라를 총 네 대 보유하고 있는데 그 중 세 대가 시그마 카메라다. 남들은 한 개도 잘 안가지고 있는 카메라가 시그마 카메라인데 나는 1년 전까지만 해도 이 시그마 카메라 세 대로 모든 디지털 사진 생활을 해결하고 있었다. 시그마 카메라를 꾸준히 쓰고 있는 유저들이 대부분 DSLR 대부흥기에 시그마 카메라에 입문한 중년 이상의 남성임을 생각하면 나는 분명 정상은 아니다. 미친놈이라는 뜻
dp2 Quattro 증명사진
그런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카메라가 있다. dp Quattro 시리즈. 어쩌면 최후의 ‘필름라이크 센서’가 될 수도 있는 포비온 센서의 최신 버전 근데 2016년산 콰트로 센서를 우리가 흔히 ‘컴팩트 카메라’라고 부르는 ‘렌즈일체형’으로 설계한 제품이다. 지금부터 이 놈을 뜯어보자.
디자인… 한 거라고?
dp Quattro의 외형적 기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2000년대 초반 가정에서 쓰던 무선 전화기를 연상케하는 길쭉한 모양에 나름 얄쌍한 바디 프레임, 그 위에 무심하게 얹어놓은 듯 툭 튀어나온 렌즈, 파지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기묘한 느낌을 주는 그립부. 내가 아무리 시그마빠 매니아여도 이것은 도저히 쉴드 불가다. 도대체 전작인 dp Merrill은 일반적인 카메라와 크게 다르지 않게 만들어놓고 dp Quattro는 이 따위로 만들었는지 따져묻고 싶은 심정이다. dp1Q와 dp2Q는 렌즈라도 덜 튀어나와서 다행이다. dp0Q와 dp3Q는 각각 초광각 화질 확보와 접사 촬영 화질 확보를 위해 렌즈 구성을 아끼지 않은 탓에 아낌없이 괴랄해졌다. 거의 직각자 수준
괴랄하다 괴랄해...
dp0Q와 dp3Q...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런 디자인의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유는 있단다. 포비온 센서가 발열이 강하기 때문에 카메라 내 또 다른 열 발생부인 배터리 부분을 센서와 멀리 떨어트려 놓음으로써 시너지를 막아 안정성을 높히기 위함이라나 뭐라나. 그럴 듯하다. 꽤 과학적이다. 근데 그걸로 이해해주기엔 너무 기괴하다. 버블경제에 힘입어 온갖 아스트랄한 컨셉의 카메라가 판을 치던 1980년대 일본 카메라 시장에서나 다양성이라는 관점으로 겨우 받아들여질법한 수준이다. 이상한 모양 때문에 당연히 수납이 어렵다. 아예 얄쌍한 것도 아니고 보편적인 카메라 모양도 아니니 어떤 카메라 가방에서는 애초에 효율적 수납이 불가하다. 내가 가진 dp2Q는 전용 렌즈 후드를 쓸 수 있는데, 후드를 쓰면 나을 것 같았지만 그건 렌즈부만 볼 때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괴랄하고 부피만 더욱 커진다. 콧대는 예쁜데 나머진 엉망인 안타까운 얼굴을 보는 듯하다. 보통의 카메라 액세서리들도 뭔가 합이 2% 정도 안맞는다. 하긴, 이런 모양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한 액세서리가 시중에 있을리가… 그야말로 기괴한 혼종이다.
이렇게 평범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
그렇다고 기계적, 광학적 성능이 혁신적이냐? 그것도 아니다. 배터리는 극악의 지속력으로 잘 알려져있다. 안그래도 배터리 소모가 많은 시스템인데, 이 요상하고 얇은 바디 프레임 안에서 배터리를 해결하려다 보니 저용량 배터리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한두 시간만 조금 열심히 찍으면 배터리 게이지가 절반 이하로 내려간다. 때문에 여분의 배터리가 필수다. 연료통이 작은 티코에 3000cc 엔진을 달아서 200km마다 주유를 해야 하니 기름통을 싣고 다니는 느낌이다. AF 포인트 수는 9개다. 19개나 90개의 오타가 절대 아니다. 마치 필름 카메라를 쓰듯 선 초점고정-후 프레이밍을 밥먹듯이 해야 한다. 심지어 상단 다이얼은 고장이 잦은 것으로 유명하다. 일명 ‘귀신 다이얼’이라고 불리는, 휠을 돌리는 방향의 반대로 설정이 변경되는 현상이 나타나면 AS 센터 직원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지갑을 열어야 할 타이밍이다. RAW 촬영 시 사진 한 장을 저장하는데 6~7초 가량이 걸린다. 그때까지는 사진 리뷰도 안되고 전원도 안꺼진다. 연사 갈기면 30초 대기 확정!
배터리 용량은 포기한 구조
역광에 매우 취약해 말도 안되게 굵은 수차가 아웃포커스 영역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직사로 빛이 들어오면 그 어떤 카메라나 렌즈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초록빛 영롱한 할레이션이 폐부를 깊숙히 파고든다. DR도 좁은데다 저조도에서 극악의 성능을 뽐내기 때문에 노출차가 큰 상황에서, 광량이 부족한 실내에서는 속수무책이다. ISO를 6400까지 사용할 수 있지만 그 누구도 포비온 센서를 이야기할 때 그 수치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200까지 쓴다고 하면 ‘열심히 쓰네’, 400까지 쓴다고 하면 ‘시그마에 지분이 있나’ 생각한다. 간혹 설정은 가능하지만 실질적으로 활용 가능한 성능을 내지 못하는 영역을 ‘서비스 구간’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포비온 센서의 ISO는 사실상 100 이외에는 다 서비스 구간이다. 노이즈, 색틀어짐, 뭉개지는 디테일 때문에 ISO를 올릴수가 없다. 충분한 광량이 없으면 그냥 찍지를 말아야 하는 수준이다. 이런 것도 필름을 연상시키는 부분이긴 하다. 이런 건 필름 라이크 아니어도 된다고…..
니가 바로 포비온의 상징 그린 할레이션이구나?
꽃잎에서 햇빛이 반사된 부분은 싸그리 정보가 날아가버렸다. DR이 허약한 포비온에선 흔한 일이다.
시그마 + 포비온 = 느리다. 촬영도 느리고 AF도 느리고 후작업도 느리고 다 느리다
심지어 후작업에서도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APS-C 포맷이면서 RAW파일 용량은 50mb가 기본이고, 시그마 전용 현상프로그램인 SPP(SIGMA Photo Pro)는 무겁고 느리고 매우 한정적인 기능만 가진 프로그램으로 악명높다. 많은 시그마 유저들이 시그마 RAW 파일(X3F)은 SPP로 현상해야 포비온의 참맛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참맛보려고 뭐 하나 조정할 때마다 5~6초씩 기다리고 있노라면 돌부처 될 것 같다. 기능과 작업 속도는 포토샵 ACR용 플러그인으로 보완이 가능하지만(비교실험결과 화질에서는 육안으로 확인가능한 차이가 없었다) 컬러모드를 후보정 과정에서 선택할 수 있는 시그마의 장점이 상실되고 보정값 저장이 안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타협을 해야한다. 혹자는 SPP에서 TIFF로 추출 후 포토샵에서 후반 작업을 한다고 하는데 TIFF가 RAW만큼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데다 TIFF의 용량까지 생각하면 한 컷이 200mb에 육박하게 돼(RAW+TIFF+JPG) 매우 비효율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p는
이쯤되면 ‘이 사람은 리뷰를 하는 건가, 극딜을 하는건가’ 싶을거다. 하지만 걸리적거리고 못생기고 편하지도 않은 이 놈은 내가 작정하고 사진을 찍으러 갈 때 꼭 내 가방 속 한 자리를 차지한다. 왜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이 카메라의 심장, 포비온 센서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앞서도 언뜻 언급했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나중에 쓰게 될 sd Quattro에 대한 글에서도 언급되겠지만 포비온 센서는 현존하는 유일한 ‘필름라이크 센서’다. 필름의 원리를 차용해 Red, Green, Blue 기록 레이어가 분리돼있고, 특유의 이미지 처리 방식으로 자연스러운 입자감과 포지티브 필름에 가까운 색감을 만들어낸다. 모두가 ‘필름룩’을 구현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이 시대에 그저 이 카메라를 쓰는 것만으로도 필름룩의 사진을 얻을 수 있으니 꽤 인상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그런 결과물을 비교적 작은 크기와 가벼운 무게로 얻을 수 있는 바디가 dp Quattro다. sd Quattro는 많이 크고 무겁다는 이야기
*왼쪽 사진이 dp2Q, 오른쪽 사진이 일반적인 베이어 센서 크롭바디로 찍은 사진이다. 비슷하게 접사에 가까운 앵글로 촬영했으며, 160% 확대한 사진을 캡쳐한 것이다. dp2Q쪽의 배경 흐림에서 분명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입자감이 나타난다.
특히 포지티브 필름과 유사한 색감이라는 것은 더욱 유의미하다. 처음 포비온 센서를 접할 때 많은 사람들이 ‘필름 색감’이라고 평하는데 도저히 내가 아는 필름 색감이 아니어서 의아했으나, 포지티브 필름을 처음 써본 후 스캔파일을 열자마자 포비온 센서로 찍은 사진을 떠올렸다. 그때야 이 카메라가 가진 유니크함을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OLYMPUS PEN FT + FUJICHROME VELVIA 50
dp2Q
*색이 가지는 농도, 전반적인 톤이 포지티브 필름과 매우 흡사하다. 네거티브 필름과 비교할 때 훨씬 색이 진하고 약간은 부자연스러운(과장된) 색감이 특징이다.
특히 RGB를 각각 기록하는 레이어를 가진 특유의 센서 구조는 일반적인 이미지 센서(베이어 패턴 센서)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세밀한 계조 묘사력을 가진다. 같은 장면에서 훨씬 렌즈 구성이 좋은 신형 렌즈를 사용해 찍을지라도 최소한의 렌즈 구성으로 만들어진 dp Quattro로 찍은 사진의 섬세한 표현을 따라가지 못한다. 말 그대로 센서의 힘이다. 아래 사진은 같은 장소에서 각각 fp와 dp2Q로 찍은 사진이다. 주 피사체인 바위 묘사력에서는 큰 차이가 없지만, 희미하게 비친 물 위의 반영에서는 바위 각 부위의 밝기 차이 묘사력이 확실히 차이난다. 또한 fp는 운무 때문에 희미한 한라산 정상을 거의 담아내지 못했지만 dp2Q는 어느정도 윤곽을 담아냈다. 참고로 이 사진은 삼각대 없이 핸드헬드로 찍은 사진이다. 삼각대를 세우고 ND필터까지 활용해 노출 시간을 늘렸다면 dp로는 거울을 비춘듯한 선명한 반영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못생겼다고, 다루기 힘들다고, 구형 바디라고 무시하기에는 강렬한 한 방이 있는 ‘작은 거인’이다.
좌 - dp2Q / 우 fp + C 28-70mm F2.8 DG DN
이 카메라를 잘 쓰기 위해서는 몇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먼저 반드시 야외이고 맑은 날에 들고 나가야 한다. 앞서 줄줄줄 언급한 단점들을 종합하면 어두운 곳, 그늘진 곳, 노출차가 심한 곳, 강한 역광 모두 이 카메라로는 피해야 한다. 광량이 확보되더라도 햇빛이 없다면 소용없다. 흐린 날은 아예 들고나가지 말아야 출사 후 이 카메라를 증오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둘째는 첫번째 조건에 따라붙는 부가 조건으로, 다른 평범한 카메라가 있어야 한다. 이 카메라가 소화할 수 있는 영역에 명백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dp만 달랑 들고 출사나가는 일은 나도 하지 않는다. 베이어센서를 쓴 보편의 카메라를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며, 반드시 같이 가지고 나가야 한다. 환경이 맞지 않는 순간에 이 카메라는 큰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 말고는 폰카보다 아무것도 나은 게 없을 수 있으니 말이다. 짐이 많아지는 걸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는 삼각대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이 카메라는 여러분들이 아웃포커싱 놀이를 하는 그런 카메라가 아니다. 그렇게 쓸 거라면 dp는 만원을 주고도 살 가치가 없다. 조리개를 조여서 해상력과 콘트라스트를 최대한 끌어올리며 디테일한 묘사에 집중해야 한다. 이럴 땐 최소한의 떨림마저 배제해야 하기에 작든 크든 삼각대가 있어야 좋다. 짐이 더 많아지는 걸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주파수만 맞는다면 짜릿한
장점과 활용법을 이야기할 때도 단점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포비온 센서와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찾을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보니 생기는 방어기제 같기도 하다. 혹여나 누가 내가 dp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고 좋아보인다고 따라 샀다가 카메라가 아닌 나를 쓰레기로 볼까봐. “난 분명이 경고 했어. 욕 나와도 내 책임 아니야”라고 하는 선긋기다. 그렇지만 마지막을 꼭 칭찬으로 마무리한다. 이 카메라가 가진 숨은 매력이 다른 단점들을 모두 날려버릴만큼 짜릿한 만족감을 줄 때가 있기 때문이다.
dp2Q - Homage to Van Gogh
dp2Q를 쓴다는 것은 난청지역에서 끊임없이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과정이다. 계속 잡음이 끼고, 소리가 나오다가도 안나오고, 한동안은 무슨 짓을 해도 영 신호가 안잡힌다. 그렇게 왔다갔다 각도를 바꾸며 신호를 찾아다니다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스테레오 사인까지 뜨는 깨끗한 신호가 스피커를 울린다. 투 바디에 삼각대까지 들고 이리저리 dp2Q를 위한 장면을 찾아다니는 게 딱 그 과정이다. 그러다 모든 조건이 딱 맞아떨어지는 절묘한 때를 찾게 되고, 이 카메라는 숨겨왔던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뿜어낸다. '기괴한 혼종'이 '아름다운 혼종'으로 최종 정의되는 순간이다.
dp2Q
물론 내 사진이 dp Quattro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주기엔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dp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누구에게 적합한지 판단할 수 있는 참고자료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당신도 주파수를 한 번 맞춰보고 싶다면 서두르되 인내심을 가지라는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소리를 하고 싶다. 안그래도 구하기 힘든데 지난해 단종돼 앞으로 점점 더 구하기 힘들어질 예정이라 서둘러야 하는데, 이미 6년간 많은 이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영원히 안고 갈 심산인 사람들만 이 카메라를 갖고 있는 탓에 어지간해서는 매물이 나오지 않는다. 매복은 빠르게, 각오는 단단히.
dp2Q
dp2Q - Fukuoka, Japan
*포비온 센서를 오랫동안 애용해 온 어느 작가분( '찐'작가다. 왕년에 패션사진 쪽에서 상당히 유명하셨던)께서 어느날 나와 dp 얘기를 하며 "dp는 살짝 어두운 실내에서 큰 창으로 바깥의 빛이 역광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찍으면 아주 예쁜 사진이 나온다"고 말했다. 왼쪽 사진이 바로 그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왜 저 사진이 찍는 순간 바로 마음에 들었는지 비밀이 풀린 순간이었다.
dp2Q - Fukuoka, Japan / 우측 사진 같은 실내에선 색이 옅어지고 붉은 톤이 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