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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향노루 Jan 27. 2023

단 하나의 렌즈만 남겨야 한다면

SIGMA 45mm F2.8 DG DN | Contemporary 리뷰

온라인 커뮤니티든, 오프라인 만남에서든 사진을 찍는 사람들끼리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면 종종 이런 질문을 주고받게 된다. "최애 화각이 몇 mm에요?"


내 대답은 이렇다 "광각에서는 28mm를 선호하고, 표준에 가까운 망원렌즈도 좋아합니다." 내가 가장 먼저 산 중고 올드렌즈가 니콘 28mm F2.8 렌즈고, 표준 줌렌즈로 28-70mm렌즈를 쓰고 있다. 표준 줌 광각단이 24mm가 아니라는 것은 보통 감점요인으로 작용해 다른 장점과의 trade-off를 따지기 마련인데 난 "오히려 좋아"를 외치며 샀다. 거기에 표준 줌 범위 안쪽인 65mm 단렌즈도 가지고 있으니 내가 봐도 내 취향은 참 고집스럽다.


오른쪽 신사분이 오늘의 주인공, 시그마 C 45mm F2.8 DG DN 되시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을 조금 바꾸면 완전히 다른 답변이 나온다. "만약 딱 하나만 렌즈를 남겨야 한다면 어떤 렌즈를 선택할 건가요?" 어떤 렌즈를 좋아하냐는 질문과는 사뭇 다르다. 선택하고 나면 다른 렌즈로 바꿀 수 없다는 불가역적(어디서 많이 들어본 단어인데….) 상황을 상정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광각도 망원도 아닌 표준렌즈가 내 선택이다. 더 구체적으로 지목하자면 시그마 C 45mm F2.8 DG DN이다.




선호와 익숙함 사이

경험상 초점거리에 대한 취향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선호와 익숙함. 일반적으로는 선호에 따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되는데, 의외로 익숙함이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굉장히 크다.


개인적으로 아는 프로 사진가분과 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35mm가 이도저도 아니게 느껴져 어렵다고 했고 28mm와 50mm가 좋다고 했다. 하지만 그분은 오히려 자신은 28mm와 50mm가 이도저도 아니게 느껴지고 어렵다고 했다. 왜 같은 화각을 두고 이렇게 다른 느낌을 받는지 열심히 얘기를 해보니 그 차이는 사진에 입문할 때 사용한 초점거리에 있었다.


SIGMA fp + C 45mm F2.8 DG DN


어려서부터 풍경사진가를 꿈꿨던 그분은 처음 사용한 렌즈가 20mm였고, 대학생 때 보도사진 학회에서 사진을 배운 나는 50mm로 시작했다.(6개월간 50mm 외엔 손도 못 대게 하는 스파르타 교육… 프로사진가가 인정한 하드 트레이닝… 슨배님들…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요?) 광각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은 나는 확실한 광각 중 그나마 표준에 가장 가까운 28mm가 입맛에 맞고, 사람에 따라 광각으로 보기도 표준으로 보기도 하는 35mm의 느낌은 50mm가 익숙한 나에게 애매함으로 규정된 것이다. 반대로 20mm가 익숙한 그분에겐 28mm는 시야가 모자란 광각이고 35mm가 적당한 중간지대로 느껴지며 50mm는 광각도 아니면서 아예 망원도 아닌 애매한 느낌이라 했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먼저 풀어놓는 까닭은 내가 남길 단 하나의 렌즈로 45mm를 선택한 이유의 핵심 키워드가 선호와 익숙함이어서다.




풀프레임의 45mm = 선호

50mm로 사진을 시작했다니 45mm가 익숙함에 의한 선택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겠지만 선호가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선택이다. 40mm 대의 렌즈를 사용한 것은 DSLR 시절 화질 중심 거포주의의 결정판으로 불리는 시그마 40mm F1.4가 처음이었고 이후 45mm 렌즈를 비롯해 올림푸스 트립35, 롤라이35, 리코 500GX 등 필름 카메라도 다수 있었다. 환산 화각으로는 시그마 dp2 Quattro, 리코 GR3x, sd Quattro에 사용한 A 30mm F1.4 DC HSM도 포함된다. (이거 40mm대에 미친놈 아니야?)


SIGMA fp + C 45mm F2.8 DG DN


40mm대 초점거리를 빈번하게 사용해 보면서 느낀 것은 이 화각대가 놀라운 범용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어려워하는 35mm까지는 넓어지지 않으면서도 50mm보다는 약간 확장된 시야를 주기 때문에 더 다가가거나 더 멀어지는 행위를 통해 준광각(?)과 표준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드러지는 왜곡이 없어 사실적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에게 필수적인 '비현실적 시각화'를 배제할 수 있다는 점과 더불어, 보통 40mm대의 렌즈나 카메라가 비교적 작은 사이즈로 완성된다는 점에서도 '카메라 분리 불안'을 겪는 나에게 찰떡이었다.


SIGMA fp + C 45mm F2.8 DG DN


내 메인 카메라인 fp에 C 45mm F2.8 DG DN은 영혼의 단짝이다. 초경량 미러리스를 추구하는 fp를 가장 가볍게 유지해 줄 수 있는 215g의 가벼운 무게, 작은 바디 때문에 버튼 수가 부족한 fp의 아쉬운 점을 보완해 주는 조리개링, 24cm의 짧은 최소촬영거리, 여타 F2.8 렌즈보다 부드러운 배경 흐림, 조리개를 조이면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화질은 이 렌즈를 언제 어디서나 신뢰할 수 있는 유용한 렌즈로 완성한다.


fp를 들이고 거의 1년 동안 마땅히 추가할 렌즈가 없어 이 렌즈로 대부분의 사진을 촬영했는데 일상 스냅이나 거리 스냅/여행 스냅이 주를 이루는 촬영 패턴상 내 시선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어 렌즈에 대한 갈증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만족스러운 사진을 많이 얻으면서 40mm 화각대에 대한 내 선호가 더욱 짙어졌다.


fp에 장착한 C 45mm F2.8 DG DN. 찰떡도 이런 찰떡이 없다.




크롭바디의 45mm = 익숙함

이 파트는 내가 다 써놓았던 렌즈 리뷰를 처음부터 다시 쓰게 만든 요인이다. 예기치 못한 시점에 라이카 CL을 영입하며 C 45mm F2.8 DG DN을 크롭바디에서 사용하게 됐기 때문이다.


CL에 45mm를 물려 사진을 찍으니 여러 장점이 눈에 띄었다. 원래도 좋은 근접촬영 능력이 크롭팩터 덕분에 더 좋은 배율로 나타났고, 사이즈나 디자인도 적당하면서 L마운트 얼라이언스다운 스무스한 호환성을 자랑했다. 그런데 반복적으로 사용할수록 알 수 없는 익숙함이 밀려왔다. 어느 날 장비함을 열어보다 시선이 꽂힌 렌즈 하나가 답을 줬다. 대학 시절 내내 사용했던 니콘 50mm F1.8 렌즈였다.


LEICA CL + C 45mm F2.8 DG DN


2005년에 사진을 찍기 시작했지만 2019년에서야 풀프레임-크롭바디의 개념과 크롭팩터를 이해한 나는 사골바디라 할 수 있는 크롭기 니콘 D80을 2009년부터 10년가량 사용했는데, 배경 흐림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줌렌즈를 떼고 조리개가 밝은 50mm F1.8 렌즈를 물려 사진을 찍곤 했다. 크롭팩터가 적용돼 70mm 언저리 시야로 나타나는 표준렌즈의 느낌은 그렇게 10년 동안 시나브로 나에게 스며들었고,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45mm를 CL에 물리면 환산 28mm를 표방한 Elmarit-TL 18mm F2.8을 물렸을 때보다 찍고 싶은 피사체와 앵글이 쉽게 눈에 들어오고 셔터 수가 많아진다.


LEICA CL + C 45mm F2.8 DG DN
LEICA CL + C 45mm F2.8 DG DN


특히 크롭바디에서 향상되는 근접 촬영 능력은 매크로 렌즈에 약간 갈증이 있던 나에게 단비와 같았다. (바디만 새로 샀는데 렌즈가 보너스로 생긴 느낌???) 요즘은 CL과 C 45mm F2.8 DG DN 조합으로 이것저것 디테일을 촬영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성능만으로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다

세상에 좋은 렌즈는 많다. 기술이 상향평준화 돼가는 요즘은 더더욱 그렇다. 하물며 중국산 렌즈도 이제는 꽤 쓸만한 성능을 자랑하는 수준까지 올라왔다.(가성비를 고려 안하면 별 볼 일 없지만 가성비가 킹왕짱) 하지만 성능만으로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게 카메라라는 이상한 세계의 특징인 것 같다.


라이카 썰도 한 번 풀어야 하는데... 이건 더 경험해 보고 쓰겠습니다.


보유 중인 니콘 28mm F2.8D 렌즈를 컨버터를 이용해 L마운트 카메라에 물리면 굉장히 유용하다. 시그마 fp에선 내가 좋아하는 화각으로 확실한 필름룩의 사진을 얻을 수 있고 라이카 CL에선 환산 40mm대의 시야 실현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용빈도가 떨어진다. 수동초점으로 사용해야 하는데 니콘 D타입 렌즈 특유의 장난감 같이 가벼운 초점링 조작감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카메라업계가 플라스틱을 적극 채용하던 시절의 렌즈다 보니 재질도 디자인도 fp와 CL에서 모두 붕 뜬다.(나 외모지상주의 싫어하는데…)


시그마는 45mm 이후 35mm F2와 65mm F2를 내놓으며 I시리즈라는 새로운 렌즈 라인업을 출범시켰는데 풀 알루미늄 소재에 시네렌즈나 과거 수동카메라 렌즈를 연상케 하는 미려한 '네오 클래식' 디자인과 수동렌즈 수준의 조작감을 더해 '프리미엄 컴팩트 단렌즈'를 콘셉트로 잡았다. 무엇을 겨냥하는 것인지 충분히 이해했고 거기에 매료돼서 65mm도 구매했지만, 그때는 I시리즈가 내 유일한 바디인 fp 특화 렌즈였기 때문에 응당 받아들이는 것에 가까웠다.


SIGMA fp + C 45mm F2.8 DG DN


하지만 바디가 두 개가 되고, 28mm를 두 바디에서 단렌즈로 더 자주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자 비로소 시그마가 왜 성능대비 가격이 비싸지는 단점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콘셉트의 렌즈를 만들었는지 100% 체감하게 됐다.(라이카라서 이러는 거 절대로 아닙니다!!) I시리즈만의 쫀쫀한 초점링과 조리개링 조작감은 AF렌즈를 수동으로 사용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며, 사진을 찍지 않을 때도 자주 이리저리 링을 돌리게 할 만큼 중독성이 강하다.


결국 I시리즈 28mm가 기약이 없으니 아쉬운 대로 35mm F2라도 살까, 보이그랜더 28mm M마운트를 들일까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또 사 미친놈아?) 결국 사진을 찍는 행위에 매료돼 있다면 그 일련의 과정 안에 포함돼 있는 중요한 즐길거리인 '장비의 심미성'과 '카메라 조작'이 주는 만족감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시그마는 이 포인트를 캐치한 것이고, 그래서 나는 시그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C 45mm F2.8 DG DN이다

여기까지가 "단 하나의 렌즈만 남겨야 한다면 어떤 렌즈를 선택하겠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TMI 답변이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이 선택은 철저히 개인의 기호와 경험을 반영하기 때문에 나의 논지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을 수 있다.


LEICA CL + C 45mm F2.8 DG DN


그럼에도 이 장황한 이야기를, 글을 한 번 뒤집어엎는 공을 들이면서까지 완성한 보람을 느낀다. 사진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대중 예술이고, 이를 통해 우리는 다른 수단보다 쉽고 아름답게 나의 개성과 내면을 표현할 수 있다. 몰개성과 대세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작은 기회라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지라도 스스로를 표현하는 수단이 있어야 한다. 표현하지 않으면 '나의 개성'은 대세에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종국엔 나의 개성이 존재했다는 그 사실까지 잊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나는 그게 가장 무섭다.


LEICA CL + C 45mm F2.8 DG DN


그래서 나는 자꾸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은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다. 짐이 무거워지고 가방의 모양과 사이즈에도 제약이 걸린다. 이를 상쇄하려면 결국 작고 가볍고 범용적인 성능을 갖춰야 한다. 내 시선을 그대로 담을 수 있는 특성을 갖춰야 한다.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예쁜 모양새까지 가졌다면 금상첨화다. 이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는 렌즈가 나에겐 시그마 C 45mm F2.8 DG DN이다. 너를 나의 최후의 렌즈로 임명한다.(카메라를 바꾸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SIGMA fp + C 45mm F2.8 DG DN
SIGMA fp + C 45mm F2.8 DG DN
SIGMA fp + C 45mm F2.8 DG DN
SIGMA fp + C 45mm F2.8 DG DN /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심쿵사 위기. 호기심에 카메라를 툭툭 건드려보는 길고양이라니...
SIGMA fp + C 45mm F2.8 DG DN
SIGMA fp + C 45mm F2.8 DG DN
LEICA CL + C 45mm F2.8 DG DN
LEICA CL + C 45mm F2.8 DG DN
LEICA CL + C 45mm F2.8 DG DN
LEICA CL + C 45mm F2.8 DG 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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