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기술은 서로를 이끌어왔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요즘은 기술과 인간의 상호 협동이 깨진 것은 물론, 서로를 등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물론 여전히 기술이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줄 때가 있다. 자주 있다. 편하게 해주고, 즐겁게 해주고, 안전하게 해준다.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은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종종 기술은 인간성을 말살하려 드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기술로 해결했는데, 지금은 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일만 사람으로 해결한다. 어떤 곳에서는 기술이 담당할 영역이 먼저 정해져 인간이 원해도 개입할 수 없다. 어떤 곳에서는 인간을 돕는 것을 한참 넘어 인간의 자리를 빼앗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기술이 없었다면 실현 불가능했을 누군가의 불순한 이상이 기술 덕분에 현실이 되고 있다.
기술을 만들고 이용하는 사람들은 항상 말한다.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라고. 하지만 그 논리는 어디까지나 기술의 정당성 설파가 중심이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 신의 존재를 전제로 논리를 펴듯 기술의 순수성에 대한 부정을 거절한다. 그들의 논리를 받아들여 언제나 사람이 문제였다 인정해 보자. 그러면 사람이 기술을 악용할 수 있음은 너무나 쉽게 예상 가능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런 안전장치도, 아무런 경고도 없이 이상만을 떠들어대며 기술을 우리 앞에 서빙한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기술이 기술을 개발한 인간을 잠식하고 공격하는 카니발리즘 같은 상황은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이율배반적 인간사를 압축한 단면이 아닌가 싶다.
원시성의 회복이 기술에 종속된 인간을 해방하고 인간성 회복을 이뤄낼 거라 주장하며 연쇄 테러를 저지른 ‘유나바머’의 사상은 인간이 기술 사회에 적응할 만한 정신적 능력이 부족하며 기술 사회를 통제할 수도 없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유나바머 선언문은 1995년 당시 몇몇 학자들에게 그 가치를 상당히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제는 본고장 미국에서조차 언급되지 않는 그 내용이 2023년 바로 지금을 기준으로 보면 더더욱 설득력 있다. 과연 우연일까? 테러리스트의 논리에 매료되는 내가 미친놈 같은데도 부정하기가 어렵다.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한다면, 대게는 나에게 반사회성과 비관주의를 느낀다.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정반대다. 나는 휴머니즘을 지지한다. 우리는 사람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하고 타인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아무 대비도 없이 기술부터 풀어놓는 것도, 기술을 악용하는 것도 결국 ‘나’말곤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명확한데, 역시 실행이 문제다. 세상 일은 뭐든 내 맘 같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