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들
"엄마 나 다섯 개 틀렸어!"
"와? 진짜? 엄청 잘했는데?"
"근데... 재시 치기 전에는 15개 틀렸어!"
"그래도... 잘했다. 지난주보다 많이 좋아졌어"
"엄마 나 학원 늦게 도착했는데, 지금 끝나고 나가는 길이야"
"매번 늦게 마쳤는데, 일찍 마쳤네. 이제 조금 감을 잡은 것 같아. 우리 그 방법이 통하나 봐"
"응!"
내년이면 중학교에 입학할 둘째와의 대화였다. 5학년 겨울방학쯤부터 영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둘째는 자신이 다닐 영어학원을 야심 차게 알아왔지만 얼마 다니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이름부터도 남다른 영어학원이었는데, 학습량과 외워야 할 단어가 이제 겨우 영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아이에게는 너무 높은 벽이었다. 아이에게서 주문이 들어왔다. 친구들이 다니는 학원에 다니면 조금이라도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다른 학원으로 옮겨달라는 얘기였다. '친구 따라 강남 가지 말아야 한다'라고 얘기하는 사람이지만 예외는 언제나 존재하는 것 같다. 특히 아이들 문제에서는. 잠깐 고민이 되었지만 둘째의 의사를 반영하여 친한 친구들이 다니는 소규모 교습소로 옮겼다.
6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영어 선생님에게서 단어를 제대로 외워오지 않는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왔지만 애써 혼내지 않고 스스로 연습할 수 있도록 분위기만 잡아주었다. 아직은 처음이니까. 그러던 중에 아이게에서 SOS가 들어왔다. 선생님과 맞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유는 비밀이라고 했다. 비록 친구들이 없어도 다시 조금 더 큰 학원으로 옮겨달라고 했다. 여러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지만 애써 큰 문제로 만들지 않았다. 아이와 맞는 학원이 있겠지, 아이의 의지와 선생님의 열정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 있겠지, 다시 동네 영어 학원을 알아보았다. 주변에서 그렇게 아이 마음만 살펴주다가 끝날 수 있다는 얘기에 살짝 걱정되었지만 원래 처음은 어려운 거라고, 몇 번의 시행착오는 필요하다고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끌어앉혔다. 그리고 다행히 지금까지 세 번째로 찾은 학원을 무사하게(^^;) 다니는 중이다.
솔직히 지금의 영어학원도 수월하지는 않았다. 외워야 하는 단어가 상당했다. 조금 늦은 영어공부, 아이는 자신이 파닉스를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고 자주 얘기했었다. 그래서 처음 영어학원에 갔을 때 3,4학년 친구들과 함께 수업해야 했는데 마음의 상처가 될 것 같아 매일 저녁 아이에게 반복적으로 해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네가 조금 늦게 시작을 하다 보니 그런 거야. 시간이 지나면 분명 잘 해낼 수 있어. 걱정 마"
위로가 되었는지, 응원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의 마음을 살피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였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다행히 이제는 파닉스 때문에 영어를 못한다는 말은 사라졌다. 가끔 영어 단어를 외우다가 "혹시 이렇게 쓰면 되는 거야?"라고 묻고는 스스로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외워야 할 단어는 늘 밀려있었다. 영어 단어 외우기. 아이가 넘어야 할 가장 높은 벽이었다. 아이는 영어 단어 시험에서 항상 재시에 걸렸고 그로 인해 1시간, 혹은 그 이상 학원에 붙들려있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때 찾은 방법이 '영어 단어를 외울 때 곁에서 도와주자'였다. 혼자 하다 보면 막히는 수가 있고, 그러면 포기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순간을 포착해서 포기하지 않고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자고 목표를 정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 카페에서 진행하는 <자꾸 감사 이벤트> 미션으로 '아이 영어 공부 도와주기 100일'을 걸었다. 거의 80일이 다 되어간다. 아이가 컨디션이 나쁜 날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진행하기 위해 노력했고, 아이 역시 인증 사진을 올린다고 하니 기분이 좋은 날에는 기분도 그려주었다.
그렇지만 인생에는 늘 복병이 숨어있다고 했던가.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항해를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지난주 아이의 영어 단어집이 바뀌었다. 중학생 필수 어휘집으로. 갑작스러운 레벱업에 아이의 동공에서 지진이 나는 줄 알았다.
'와. 이건 진짜 모르겠어'
'감이 하나도 안 와'
아이의 충격을 애써 외면하면서 금방 익숙해질 거라고 말했지만, 내가 봐도 쉽지 않아 보였다. 첫날 영어 단어를 외워갔는데, 다섯 개밖에 맞추지 못했다고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모른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자문해보았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아이를 잘 도울 수 있을까?'
이번에는 곁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영어 단어 외우기'를 선택했다. 이심전심이라고, 엄마도 모르니까 함께 외워보자고 제안했다. 솔직히 중학영어라고 하지만 내가 모르는 단어가 상당했다. 나 역시 잘 모르는 상황에서, 같이 영어 단어를 외우는 입장에서, 아이를 탓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경선식 흉내를 내면서 외우기도 하고, 연상법으로 외우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 함께 영어 단어 외우기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어제저녁에 전화가 온 것이다.
"엄마 나 다섯 개 틀렸어!"
엄마의 과한 칭찬이 머쓱했는지 실은 그전에 15개 틀렸다고 고백하는 아이, 아이의 마음이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었다.
그렇지만 진심이었다. 지난 주만 해도 다섯 개밖에 못 맞췄는데 이 정도면 엄청난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엄마 그런데 밖이 너무 추워!"
"그렇지? 얼른 조심해서 집에 가. 엄마도 곧 집에 갈 거야"
"응!"
아이의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졌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찾아가는 모습이 느껴져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영어 단어 외우기. 누군가에게 아주 쉬운 일이지만, 나와 둘째에게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 만만하지 않은 일을 함께 해결해나가면서 조금씩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물론 이 과정 뒤, 모든 것이 수월해지고 좀 더 나은 결과를 만날 거라고 장담하지는 않는다. 인생은 고양이 걸음처럼 온다고 다가온다고 했으니 모를 일이다. 하지만 건설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볼까 한다. 적어도 노력을 기울이는 한,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끝내지는 않을 테니까.
-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