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린 마음에 배우고 싶다고 졸랐는지, 아니면 훗날을 기약하며 성공적인 삶을 위한 주춧돌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이 권유로 발을 디디게 되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하여간 나는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다. 지금도 학원 이름이 기억난다.
계명 피아노 학원.
작은 체구에 유난히 손가락이 하얗고 길었던 피아노 선생님. 지금은 그런 곳이 많지 않은데, 그때는 학원의 방과 방 사이에 높이 차이가 있었다. 조금 높은 방에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었고, 그보다 아래의 작은방에 피아노가 3대, 4대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처음 '바이엘 상'을 시작으로 그다음 '바이엘 하'. 체르니 100번, 체르니 30번, 체르니 40번으로 넘어갔다. 중간에 바흐나 소나티네 작품집, 모차르트, 명곡집을 거쳤던 것 같다. 40번에서 10번 정도 갔을 때, 아마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피아노를 그만두었다. 음악적 소질이 부족했던 건지, 더 이상은 피아노를 치고 싶지 않다는 나의 의지 때문이었는지, 학업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부모님의 결단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만두게 되었다.
몇 년간의 피아노 학원, 당시 주변에는 피아노를 다니는 친구들이 제법 있었다.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학교에서 몇 명은 피아노를 칠 수 있었고, 그중의 한 사람이 나였다. 아주 가끔씩 자랑질을 하기 위해 일부러 피아노 뚜껑을 열고 닫았던, 그러고는 무심한 듯 건반을 눌러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기를 즐겼던 사람도 나였다. 하지만 언제나 거기까지였다.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쳐야 하거나, 끝까지 완성을 해야 할 상황이 벌어지면 어느새 도망가고 그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서 피아노 대회에 나간 기억이 많지 않다. 한, 두 번 정도 되었으려나. 대회를 앞두고 계속해서 연습을 해야 하는데, 연습량 부족도 문제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피아노를 즐기기 못한다는 것이었다. 해결해야 할 숙제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방향은 이상하게 흘러서 그런 상황을 엄마는 다른 방향으로 이해하셨다. 피아노가 없어 집에서 연습을 하지 못하니 따라가지 못하는 거라고, 어려운 것을 연습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학원만 다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엄마는 없는 살림에 일부러 따로 돈을 모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피아노를 사주셨다. 지금 큰 아이 방에 있는 영창 피아노는 그렇게 해서 나에게 오게 되었다.
아버지도 그러셨지만, 엄마는 경주 7남매 맏이로 태어나셨다. 이모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형제 중에서 공부를 제일 잘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집안 사정이 어렵고 줄줄이 동생이 있다는 이유로 공부에 대한 꿈을 포기해야 했다고 들었다. 그래서일까. 요즘 와서 두 아이를 키우면서, 한 번씩 생각나는 오래전 엄마의 말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도 요즘 같은 시절에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배우고 싶은 거 배우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서"
그런 시절을 보낸 엄마였기에 가진 게 없었던 그 시절에 없는 살림에 몇 달을 모아 피아노를 사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너만큼은 나하고 다르게 살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보낸 엄마의 밤이 얼마나 많았을까.
요즘도 가끔 피아노에 앉는다. 피아노에 앉으면 악보가 기억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유일하게, 그러니까 악보를 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칠 수 있는 곡이 '워털루 전쟁;이다. 대회곡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회 준비를 위해 얼마나 건반을 두드렸으면 더듬더듬하기는 해도 악보를 보면 따라갈 수 있는 상황이다. 친척 결혼식을 위해 연습했던 '결혼 행진곡' , '아드리느를 위한 발라드', '엘리제를 위하여'까지. 열심히 두드렸지만 지금은 앞 소절만 기억이 난다. 어찌 되었건 수준과 상관없이 완성도와 무관하게 주말이면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쓸어본다. 어떤 날에는 통기타 악보집을 갖다 두고 '행복의 나라로'로 치면서 흥을 돋우기도 한다.
나이 들어서도 만끽할 수 있는 혼자만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어, 두 아이에게 어떻게든 악기 하나를 가르쳐주기 위해 노력했다. 두 아이에게 모두 피아노를 가르쳐주었지만, 두 아이 모두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 피아노 건반과 이별을 선포하였다. 다행히 큰 아이는 취미 수준에서 플루트를 이어나가고 있고, 둘째에게 우쿨렐레, 드럼, 바이올린을 시도해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별식을 곧 해야 할 것 같다. 더 이상의 시도는 지금으로서는 욕심이라는 생각에 혼자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피아노를 치기에 적당하지 않은 짧은 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날이 나는 좋다. 피아노를 치다 보면 논리로만 이해할 수 없는 영감에 의존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표현을 잘하고, 완벽하게 연주하고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 안의 뭔가와 만나면서 리듬을 타는 느낌, 손가락이 피아노를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를, 내 심장을 두드리는 것처럼 마음을 붕 뜨게 만든다. 내 속에 있는 뭔가와 새롭게 관계를 맺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그런 느낌이 좋아 시간이 나면 피아노 앞에 앉는다. 피아노를 치기 전의 세계의 문이 닫히면서 새로운 문이 열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마치 피아노가 내가 살아가는 시간을 단층 촬영하듯 분리시키는 기분이다.
엄마가 처음 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줄 때의 의도를 성공적으로 마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의 배려 속에 나는 피아노를 나의 세계에 데려올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마흔이 넘은 나이에 조건 없이 피아노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 피아노를 치는 동안 근원을 알 수 없는 감정이 잦아드는 것도 좋고, 안개에 둘러싸여 실체가 불분명했던 것이 제풀에 꺾여 실망감을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잘 치는 것과 상관없이 삶과 조화로움을 유지하는 일에 피아노가 큰 몫을 하고 있다. 나에게 이런 독특한 세계를 만나게 해 준 부모님에게, 나의 세계에 피아노를 넣어주기 위해 고생한 엄마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