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by 윤슬작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여느 때보다 차분한 목소리가 계속 신경이 쓰인다.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었는데 말이야"라고 시작한 그녀는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넘쳤다. 그런 그녀와 달리 유난히 차분한 내가 친구가 된 것은 누가 봐도 어색한 일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시간이 흐르면서 호기심은 자연스럽게 옅어졌다. 그녀는 나보다 5년 먼저 결혼했고, 올해 아들이 대학에 입학했다. 그녀가 서울로 시집가면서 얼굴은 거의 볼 수 없었다. 가끔 친정에 내려오기는 하지만 만남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모두 바빴다. 그녀는 그녀대로. 나는 나대로.


하소연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통화가 길어진 날에는 밤 12시까지 이어졌다. 이야기는 이어졌고,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어 보이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그리고 깊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물론 늘 그렇지는 않았다. 우스꽝스럽게 마무리되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무엇이든 궁극에는 친밀감으로 마무리되었다.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말에 예약할까 했다가 이내 일이 있어 어렵다는 얘기를 하고, '이럴 줄 알았어' 하면서 깔깔거리며 웃는 식이었다. 늘 이렇지, 우리가 하는 게 이렇지, 수동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않은 목소리에 서로에게 기대었다. 처음에는 커피잔을 가지고 전화기를 붙잡았지만, 어느 날부터 옆에 생수통을 하나 갖다 놓기 시작했다. 목을 축여가면서 대화를 이어나가자는 생각에서 그런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적당한 지점에 몸 안으로 뭔가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그녀와 나는 즐기는 사람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응"

"내가 어디에서 상처를 받는지를 알아냈어"

아주 가끔 맥락 없는 이야기에 당황할 때가 있는데 이번이 그랬다.

"네가 그랬잖아.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편하게 살아도 된다고..."

"한 번씩 그런 말을 했었지"

"나 그 말을 이해를 못 했거든. 나는 편하게 살고 있는데, 왜 자꾸 편하게 살아라고 얘기하는 거지... 그랬거든"

"편하게 살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었고..."

"그러니까, 하여간 그 말에 대해 늘 의문이었거든... 근데, 근데 말이야. 이번에 알게 되었어..."


전화기를 타고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힘겨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주 약간의 허무함이 느껴지는, 아주 가끔 느꼈던 우울감이 묻어있었다. 예전에 그녀에게 어떤 날, 어떤 뉘앙스로, 어떤 표정으로 저런 비슷한 말을 던졌었는지 잠시 생각했었다. 그녀는 시댁 일을 도와드리고 있다. 시댁에서 조금 큰 식당을 운영하고 있고, 그 식당에서 돈을 맡아서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일 년 전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지금은 임시 휴무 상태이다. 식당에서 일을 마치고, 아이를 돌보면서 몸을 혹사했던 그녀. 그러면서도 힘들다는 내색을 별로 하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당연'이라는 말에 아마 적잖이 불편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세상에 '당연히'가 어디에 있을까.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그녀는 특별했다. 어른에게도 잘하고 남편에게도 잘 하는 그녀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늦은 시간에 혼자 한강에 달리기를 하러 간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늦은 시각이었고, 남편과 같이 가는 것도 아니었다. 낯설음이 느껴지면서도 고된 일과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도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었다. 달리기를 끝내고 집으로 걸어가면서도 우리의 통화는 계속되었다.


아이 공부 문제, 남편과의 갈등, 시댁의 일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꼼짝하지 못하는 처지였지만 별 내색 않고 잘 지내오던 그녀가 남편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제주도에 왔다는 말을 했을 때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내일 일도 해야 할 텐데, 괜찮으려나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별 상관없어 보였다. 아니, 하루 빠진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내가 어디에서 상처를 받는지를 알아냈어. 네가 그랬잖아.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편하게 살아도 된다고... 그 말을 이해를 못 했거든. 나는 편하게 살고 있는데, 왜 자꾸 편하게 살아라고 얘기하는 거지... 그랬거든. 그러니까, 하여간 그 말에 대해 늘 의문이었거든... 근데, 근데 말이야. 이번에 알게 되었어..."

"그래?"

"너무 내 마음으로 살아낸 게 문제였어"

"..."

"그러니까 아마 이런 마음에서, 저런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랬겠지... 늘 이런 식이었던 거지. 마음도 넓지 않으면서 마음 넓은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려고 한 거지. 실상은 그게 아니면서 말이야.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고, 그 마음으로 내게 잘 해주길 바라면서 말이지"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그래, 나도... 모르긴 몰라도 다른 사람도 그럴걸?"

"그런가? 하여간 나는 아니라고 믿었던 것 같아. 내가 이만큼, 이렇게 하면 알아서 저만큼, 저렇게 해주겠지. 뭐 이런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니까..."


의외였다. 평소 그녀답지 않았다. 그녀가 자주 쓰는 말투, 표현이 아니었다. 막혔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막힌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마치 괴물의 집을 걷는 것처럼,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길을 손으로 더듬는 느낌, 애써 한 걸음씩 옮겨나가는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다.


"나도 비슷한 마음 많이 들어. 나도 그래..."

"그래. 나만 그렇지는 않을 수 있어. 근데 난 좀 심했어. 사실 남편이 일을 하나 새로 시작하는데, 아는 사람이 중간 역할을 했었거든. 근데 그 사람이 서류상의 문제를 남겨놓은 채 연락 두절이 된 거야. 중간에서 얼마나 혼이 났는지. 밤에 지인 집에도 찾아가 봐도 사람은 없고, 시댁은 물론 남편 눈치 보면서 지내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이런 경우에는 평소 잘하고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어. 계속 눈치를 보게 되더라고. 식사도 더 꼼꼼하게 챙기고, 집안일도 더 열심히 하고, 식당에 가서도 더 열심히 하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남편은 별일이 아니었나 봐. 중간에 몇 번 말을 붙여봤는데 얘기도 제대로 해주지 않고, 혼자 눈치만 보고 지냈거든.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내 잘못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알고 보니까 이미 남편은 그 사람과 연락이 닿아서 일을 하고 있더라고... 벌써 한참 흘렀더라고... 본래가 말이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동안 내가 눈치를 보고 신경 쓴 것을 안다면 일이 잘 해결이 되었으면 얘기해 줘야 하잖아? 난 그런 것도 모르고 계속 혼자 애쓰고 있었고... 그날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이게 뭐지.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거지. 과연 이 사람이 내가 알고 있던 사람, 맞나? 싶은 거야. 생각이 거기에 닿자 주저 없이 제주도 티켓을 끊었어. 제주도 티켓을 예약해놓고 남편에게 물어봤어. 딱히 뭔가를 기대한 건 아닌데, 물어봐야 할 것 같았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잘 해결되었다는 얘기를 왜 나에게 전하지 않았냐고. 남편이 그러더라. 신경 쓰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그러면서 나한테 오히려 되묻더라. 그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었어? 알았으면 얘기를 해줬다나..."


"아차! 싶었어. 그때 정말 망치로 머리를 한대 두들겨맞는 느낌이었어. 혼자 너무 생각이 많았구나. 너무 애쓰면서 살아가고 있구나. 모든 것을 나와 연결하고 있구나. 모든 것을 너무 내 일처럼, 내 마음처럼 바라보았구나... 그러면서 네 말이 떠올랐어. 왜 나더러 좀 편하게 살아라고 얘기했는지..."

"참 희한하지 않니... 너한테는 그렇게 잘 보이는 것이 왜 나는 잘 보이지 않았을까? 왜 이것저것 따져보지 않고 덮어놓고 내 마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했을까... 진짜 나 웃기지?"

"아니야. 아냐... 너 하나도 안 웃어. 너 많이 속상했겠다..."

"그래, 정말 속상하다는 말... 그 말이 정확할 것 같아..."



목소리에 물기가 젖어있다는 것은 순전히 내 기분일 수 있다. 뭔가 혼자 덩그러니 내버려 둔 느낌이다. 당장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 그녀 곁에 가고 싶었다. 당황스럽고 속상해할 그녀를 안아주고 토닥여주고 싶었다. 몸에 맞지 않은 구두를 계속 신다가 빨갛게 물집이 생긴 것처럼 여기저기가 따끔거린다는 그녀. 그녀도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읽어내기는 어렵다고 했다. 마음이 부스럭거린다는 그녀. 가슴속에서 뭔가 덜컹거리고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는 그녀. 온기를 채워줄 수 있는 말은 전해주지 못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은 것 같아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뚜루룩. 뚜루룩.

물이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런데 있지. 정말 남편은 모르더라. 내가 어디에서 상처가 생긴 것인지. 무엇 때문에 마음이 아픈지 전혀 모르더라. 나랑 20년을 함께 살았는데, 나를 너무 모르더라... 하긴 그러고 보면 나도 남편을 몰랐던 것 같아. 20년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도 여태껏 남편을 몰랐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새 신발을 신기엔 너무 늦은 것 같고... 그냥 구겨서 좀 신다가 나중에는 맨발로 다녀보려고"



-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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