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 서류를 제대로 보내주지 않아서 두 번 일을 하게 되었다는, 아이가 학원에 오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고 아이를 혼쭐내고 있다는, 법정에서 만나도 그렇게 큰소리칠 수 있는지 한번 지켜보자는. 볼일을 보는데 자꾸 시끄럽게 울어서 복도에서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내일 키즈카페에 가지 않겠다는. 60cm 블록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옆집이라고 부르고 있다. 옆집에 볼일을 보러 온 사람들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놓이자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문을 나오기만 하면 딴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이다. 옆집에서는 들리지 않을 이야기가 가만히 앉아있는 나에게 너무 상세하게 전해진다. 전혀 모르는 눈치인데, 얘기를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처음 한두 번 호기심이 발동한 것은 사실이다. 낭창한 목소리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도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하지만 상황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던 날,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주머니, 목소리가 너무 커요"
전혀 예상하지 않았음이 역력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이에게 화가 날 대로 화가 난 아주머니는 자제력을 발휘하는가 싶다가 이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만히 지켜보는 모습이 신경 쓰였는지 계단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미소가 사라진 표정 때문이었을까,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 때문일까, 목소리가 한결 줄어든 느낌이었다. 조금 더 참을 걸 그랬나 싶다가도 한 번은 얘기해 줘야 했어하며 정당방위였음을 속삭이며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내 '이런 익숙한 상황은 뭐지?'라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랬다. 내 눈으로 바라본 아주머니는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슷한 문제로 고민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애써 연출하지 않아도 그런 상황에 놓인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다. 원인을 제공한 것에 대한 나름의 증거도 몇 가지를 들이밀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아주머니의 행동이 이해 가고도 남음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화가 날 대로 화가 난 상태에서 앞집, 옆집에 자신의 상황을 큰 목소리로 알릴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감정을 터뜨릴 자유가 있다고 해서 타인의 영역을 침범할 자유까지 주어지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면서 차마 더 이상 말하지 못한 것은 삶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자리로 돌아와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다짐했다. 화가 날 대로 화가 나더라도 앞집, 옆집에 들리도록 감정을 폭발하지는 않도록 노력해야지, 사건에 대해 기계적으로 반응하지 않도록 해야지라고. 세상이 여기저기에서 내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다. 너무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극적인 방식이든, 친근한 방식이든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고, 빠져나갔으면 좋겠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