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핸드폰에 포켓몬GO를 설치했다.
게임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굳이 게임 근처에 가려고 애쓰지 않았다. 게임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한번 빠지면 쑥 빠져드는 습관인 것도 이유이겠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를 굳이 만난 이후에 그만두었던 기억이 난다. 다양한 결말이 있겠지만, 나는 항상 새드엔딩을 맞이했던 기억이 있다. 고스톱의 법칙도 잘 모르면서 피망맞고라는 게임에 빠진 것이 있다. 고스톱을 피망맞고를 통해 배웠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동생과 함께 재미로 시작했지만 결과는 완벽한 패배였다. 단순히 게임머니를 잃는 문제가 아니었다. 인성에 치명적이었다. 진 것을 감당하지 못했고, 감당하지 못한 감정은 그 이후의 시간을 파괴하는 일등공신이었다. 비단 피망맞고를 할 때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포켓볼을 배울 때도 그렇다. 할 일이 있는데도 미루었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 상황인데도 핑계를 대고 빠져들었다. 일상의 많은 것들이 게임과 그 이후의 감정으로 인해 순서가 뒤바뀌었고 마음이 변덕을 부리는 통에 몇 가지의 아쉬움이 생겨나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경험주의자를 선호하지만, 경험에서 배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 이후로 게임 근처에는 발을 디디지 않았다. 나의 성질과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한 이유일 것이다.
어릴 때 둘째가 게임을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게임을 하기 위해 좋은 컴퓨터를 남편이 사주겠다고 했을 때 솔직히 거부감이 들었다. 나중에 후회할 것 같은데 애써 그런 상황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빠지기 시작하면 정신없이 빠져들 텐데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정말 저절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어차피 하고 지나가야 하는 거야..."
"이왕 할 거라면 차라리 먼저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중학교 1학년이 된 아들은 종종 아빠 덕분에 게임에 입문할 수 있게 되었다고 얘기한다. 남편의 얼굴에 살짝 비치는 당혹스러움을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남편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짓게 된다. 정말 아들은 몇 년 동안 게임에 매달렸고, 밥 먹을 시간을 아껴가며 게임을 했다. 중노동이라고 하는, 서열이 분명한 게임 세상에서 최끝단에 있던 아들은 에너지를 모두 모아 게임에 갖다 부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5년, 6년. 정확하게 몇 년의 시간을 보냈는지 잘 모르겠다. 그 덕분에 실랑이를 벌이는 몫은 나에게 떨어졌고, 혼자 애를 타면서 전전긍긍했다. 무엇이든 반복하면 강화된다고 했다. 아들 역시 그 룰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조절을 하겠다고 했지만 조절에 실패했다. 이제는 게임이 시시하다고 말하면서도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몇 시간씩 컴퓨터를 붙잡았고, 자연스럽게 학원에서는 전화가 자주 걸려왔다. 숙제를 해오지 않았어요, 학원에 오지 않았어요, 학교 숙제를 한다고 해요까지 이유는 다양했다. 컴퓨터에 잠금장치를 하고, 약속을 새롭게 정해 주말에만 풀어주기도 하면서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남편 말대로 지나가기는 하는 걸까, 지나가기는 하겠지, 밤마다 동전 던지기를 하는 심정을 버텨냈다.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듯, 임계점을 마주하고 나면 변화가 생기는 것처럼, 아들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집중적으로 매달리던 게임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분위기는 급물살을 탔고 게임을 지우고 컴퓨터를 내보내겠다고 했다. 물론 게임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다. 다만 컴퓨터로 하던 몇 가지 게임을 정리하겠다는 의미였다. 그 얘기가 나오던 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울며 불며 떼쓰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런 선택을 하겠다는 담담한 목소리가 그저 고마웠다. 고통이라는 단어가 아닌 가능성이라는 단어로 새로운 선택을 해 준 아들이 고마웠다. 얼마나 흘렀을까. 아들은 예전에 했던 포켓몬GO를 다시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컴퓨터 게임에 매달리기 전, 남편과 아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밖에 걸어 다니며 포켓몬을 모았다. 그러다가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붙박이가 되었는데, 얼마 전부터 레벨을 올리겠다며 포켓몬을 모우는 것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포멧몬을 잡으러 짬짬이 밖에 나가서 걷기도 하는 모습에 컴퓨터 붙박이에서 탈출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 아이의 마음도 알아보고, 아이와 공유할 것을 넓히기 위해 나의 폰에도 포켓몬GO를 설치했다. 그러고는 밤마다 각자의 실적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엄마 어젯밤에 레벨 12 됐어!"
"근데, 엄마는 왜 잠만보가 안 나와?"
"아니 포켓볼을 던지면 왜 이렇게 안 맞지?"
하소연과 투덜거림에 장단을 맞추는 아들의 목소리가 밝다.
"예전에 아빠 폰으로 포켓몬 했더니 내 기록으로 안 잡혀.. 아이고. 아쉬워"
"엄마, 6자를 그리듯이 스무스하게...던져 봐.. 아니 이렇게..."
"레벨일 올라가야 좋은 포켓몬이 나오거든"
포켓몬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슬쩍 말을 건넨다.
"아들, 이제 고만하고 수학 숙제하러 가지?"
"어. 이거 잡던 거만 잡고 그만할게"
"오케이"
삶은 매 순간이 시작점이다. 둘째와 포켓몬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삶이고, 포켓몬을 그만두고 수학 숙제를 하라고 얘기하는 것도 삶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다정하게 맞이하느냐, 퉁명스럽게 맞이하느냐. 두려워하면서 피할 것이냐, 아니면 몸을 담그고 느껴볼 것이냐. 선택과 동시에 만족과 후회가 찾아오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순간순간의 결정이 훗날 어떤 결과를 만들지는 알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이 마음을 무겁게 하고, 선택을 두렵게 하지만, 그럴 때면 나는 유독 의문형이 아닌 단답형의 문장을 떠올린다. 예를 들어 "삶은 나를 도와준다. 내가 선택한 것이 옳을 선택일 것이다"와 같은.
from. 기록 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