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했을 때 친정엄마는 굉장히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도 그렇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을 봐도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지극정성이었다. 걱정이 많아 잔소리가 많았고, 불안이 커서 속마음을 자주 들켰다. 어떻게 보면 걱정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 같다.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걱정, 날씨가 더워지면 날씨가 더워진다고 걱정, 바람이 불면 바람이 많이 분다고 걱정이었다. 이제는 자식에 관해서만큼은 조금 물러나 있어도 될 것 같은데, 말로는 뒤로 물러났다고 하는데 목은 앞으로 쭈욱 늘어난 느낌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친정엄마는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았으면 좋을까.
언젠가 첫째에게 말했던 것처럼, 원 없이 공부해 보고, 국내든, 해외든 다니면서 뭔가 성과를 내기 위해 동분서주했을 것 같다. 작은 기업을 맡았다면 보다 큰 기업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을 것 같고, 아이를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면 한 명의 아이에게라도 좋은 가르침을 주기 위해 노력했을 것 같다.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비교적 간단한 일을 했더라도 일을 마치고 나면 새로운 것을 배우러 다니거나 동호회에 가입하여 활동적으로 생활했을 것 같다. 그랬을 것 같은 엄마가 가정주부로 남았다. 오로지 자식을 뒷바라지하고, 남편을 내조하는 것이 천직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요구하는 목소리를 애써 부정했다. 걱정이 많아 두려움에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또 놀라기는 얼마나 잘 놀라는지, 거기에 인과관계를 떠나 스스로에게 얼마나 엄격한지. 그런 까닭에서일 것이다. 잘 모르겠지만 '자유로움'을 손에 쥐여줘도 '감히 내가 자유를 누려도 되는 건가?'라며 화들짝 내려놓았을 것 같다.
'이제는 바라는 거 없어'
습관처럼, 그리고 아무 상관 없다는 것처럼 엄마는 얘기한다. '건강하면 되었지'라고. 하지만 나는 안다. 큰 아들에게 작은 변화가 생기면 며칠 동안 잠을 뒤척인다는 것을, 둘째 아들에게 걱정이 생겨나면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를 두고 혼자 만리장성을 그린다는 것을.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톤만 들어도 대략 어떤 상황인지 예측이 된다. 그럴 때마다 안쓰럽기도 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걱정을 내려놓고, 믿어주고 기다리면 된다고 얘기하지만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한참 설교 아닌 설교를 늘어놓다 보면 엄마가 얘기한다.
"너도 애 낳아서 길러봐. 그때는 알 거야..."
"엄마, 나 애 낳아서 기르고 있는데..."
"아직 네가 몰라서 그래, 더 살아보면..."
엄마 말이 옳을 수 있다. 아직 덜 살아봐서 이렇게 여유로운 소리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정작 두려워하는 것은 따로 있다. 설사 엄마의 말이 맞더라도, 그러니까 더 살아 보면 더 걱정할 일이 생겨나더라도 걱정과 불안에 둘러싸인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엄마로 살든, '나'로 존재하든 걱정과 불안으로부터 최대한 거리 두기를 유지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이런 얘기를 엄마에게 들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 내가 살아봤는데 말이야. 그렇게 걱정하면서 살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았어... 왜냐하면..."라고.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