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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있는지, 쓸모없는지 당장은 모를 수 있다

by 윤슬작가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한 적이 있다. 정확하게는 아버지 일을 도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상황은 이랬다. 스물 중반, 회사가 본사를 서울로 옮기는 과정에서 함께 따라가지 못한 나는 급하게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일시적 백수 상태였다. 딸이라는 이유로 엄마와 아버지는 서울행을 찬성하지 않았고, 졸지에 퇴직자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던 경리 언니가 문제를 일으켰고, 사람을 구할 때까지 일시적 백수인 내게 제안을 하셨다.


"금방 사람 구해질 테니까, 그때까지만 있으면 돼..."


'금방'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직장이 되어 버렸다. 간단한 경리업무만 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현금 관리, 은행 업무, 회계 업무까지 차례대로 넘어왔고, 결혼 후 대구로 올 때까지 제법 오랜 시간을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때 배운 것이 상당했다. 사람을 만나는 일, 은행을 자주 오가며 예금과 대출을 관리하는 일, 회계 업무를 통해 대차대조표를 살펴보는 일까지 학교에서 배워 이론만 알고 있던 것을 덕분에 현장에서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물론 배운 것은 경리업무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작은 회사이다 보니 자재, 생산, 영업관리에 대해서도 얕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서 배우는 것이 나중에 쓸모 있을까?'


지금에와서 고백하면 여러번 곱씹어 생각해보면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 밑에서 이런저런 세상 경험을 많이 한 것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다. '이렇게 해야겠구나'라는 것을 배우기도 했지만 '이렇게 하지 말아야겠구나'라는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하나의 방향이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데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 그중의 하나가 '아웃소싱'이다.

나는 일찌감치 모든 것은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업무를 나눠야 한다는 것도 배웠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믿고 맡겨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사업을 하는 동안 아버지는 아웃소싱을 해서 성공하는 모습도 보여주었고, 그로 인해 실패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항상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내가 알고 있어야 하고, 컨트롤할 수 있어야 것이었다. 어차피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으니 잘하는 사람(전문가)와 협업할 방법을 찾는게 훤씬 유리하다고 했다. 하지만그렇게 말씀하신 아버지 역시 믿고 맡기는 것을 어려워했다는 것은 비밀이다.

요즘 출판사, 에세이 코칭 아카데미를 운영하다보면 예전의 기억이 종종 떠오른다. 장르도 다르고, 업종도 다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때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사업을 시작하고 관련 지식이 부족해 매일 조금씩 공부하고, 행동으로 옮기려고 노력하면서 습득한 것도 있겠지만, 감각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아버지 옆에서 경험한 것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 관계를 맺는 법, 먼저 다가가는 법, 실수를 인정하는 법, 협업하는 법, 누군가를 믿어주는 법까지.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진실로 명언이다.

'금방 사람 구해질 때까지만'이라고 해서 시작한 일이 내가 사업을 하고, 그 일을 이어나가는데 든든한 뿌리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from.기록디자이너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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