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는 '성실한 노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성실한 노예는 주인이 맡기는 일을 완벽하게 해낸다. 감자 씨를 뿌리고, 거두고, 쌓는 일까지 주인이 시키는 모든 일을 문제없이 척척해내었다. 그런 노예에게 어느 날 주인이 새로운 일을 맡겼다.
"큰 감자는 오른쪽 구덩이에 넣고, 작은 감자는 왼쪽 구덩이에 넣어라"
하지만 해가 떨어지도록 노예가 돌아오지 않았다. 궁금하게 여긴 주인이 가 보았더니 노예가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들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이를 궁금하게 여긴 주인이 이유를 묻자, 노예가 대답했다.
"감자를 집을 때마다 이건 큰 감자로 넣을지, 작은 감자로 넣을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어요. 너무 힘들어요. 앞으로는 이런 일 시키지 마세요"
노예의 하소연을 읽으면서 얼마나 공감했는지 모른다. 이제는 기억에서도 가물해진, 거의 잊고 지낸 오래된 기억이 떠올라 그 페이지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시골에서 살아본 적이 없고, 채소를 길러본 적도 없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시금치를 다듬는 것은 물론 고추를 직접 따 본 경험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시댁에서 와서 처음 상추를 따고, 고추를 따게 되었다. 비닐을 챙겨 밭으로 가는 내게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작은 것은 맵지 않으니까, 작은 것만 따면 된단다"
그날 나는 밭에서 고추 몇 개를 따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노예처럼 엉엉 울지는 않았지만, 진짜 딱 그 심정이었다. 어떤 것이 작은 고추인지, 무엇이 중간인지, 또 큰 것은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보면 작고, 또 저렇게 보면 크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기준이라는 게 없었다. 상추를 딸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드라운 것을 가져오면 된다고 하는데, 내 손에는 모든 게 보드랍게 느껴졌다. 정말 대혼란이었다. 그날 고추의 절반은 실패했다. 상추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적당히 잘 떼어 가져와야 하는데, 상추밭을 망친 분위기가 되어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모른다. 불편했다기보다는 충격이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이렇게 사소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혼란도 아니었고, 한심한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직접 경험하지 못 헸고, 누군가를 통해 배운 적도 없었다. 그러니 기준이라는 것이 없었다. 행동은 더딜 수밖에 없었고 자신감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빅데이터가 없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것은 몇 번 그런 어려움을 겪은 후, 내가 포기보다 용기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때부터 열심히 물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 솔직히 거의 모든 것을 물어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게 작은 거예요?"
"이렇게 자르면 되나요?"
"여기서부터는 매운 건가요?"
"이거는 먹을 수 있는 건가요? 없는 건가요?"
"이게 보드라운 거 맞나요?"
내 안에 뭔가 '이런 것 같아'라는 정도의 기준이 생길 때까지 귀찮을 정도로 많이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소박하지만 기준이라는 게 만들어졌고, 그때부터는 나는 나를 덜 괴롭혔다. 최소한 바람 앞의 등불은 아니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기준이라는 것도 상대적이다. 기준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최고의 결과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는 기준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훨씬 낫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야 스스로를 덜 흔들게 되고 덜 괴롭히게 된다. 멋진 정답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기준을 가진다는 것은 망망대해에서 북극성을 발견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묻는다. 그리고 배움을 쌓아간다.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빅데이터를 쌓기 위해, 궁극적으로 나를 구하기 위해.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