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 쓰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글을 잘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어떤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으면서 늘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특히 저 '잘'. 짧은 외마디가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주저하게 만든다. 어른이든 아이든, 누구랄 것 없이 말이다.
오기인지, 의지인지, 열정인지 구분할 수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가능하다면, 할 수만 있다면 저 '잘'을 떼어내는 일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잘'이 떼어진 자리에 새싹이 돋아나고, 줄기를 뻗어올리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그렇게 하고 나면 내가 뭔가 그럴듯한 일을 하고 있는, 꼭 '나이어야만' 하는 일을 찾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잘'이 떼어난 이후부터는 내가 할 일은 많지 않다. 딱히 내가 뭔가를 해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줄기 끝에 스스로 꽃잎을 피워냈고, 기쁨을 발견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던 터라 더욱 그렇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부담감이라는 단어는 어깨를 짓눌렀다. 타이틀을 하나씩 걸치면서 책임감도 늘어났고, 걸음은 수시로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 했다. 내 글에 의해, 말에 의해, 삶에 의해. best가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을 감히 덤빈 게 아닐까, 최고의 수준도 아니면서 '잘'을 떼어내도 된다고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게 아닐까.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얘기하면서도 스스로 '최선에 묶인 게 아닐까'라는 의구심으로 내가 해낸, 혹은 하고 있는 일을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스스로 참 잘했다고 여겨지는 것 중의 하나가, 입 밖으로 애써 끄집어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황하거나 주저하는, 적어도 내가 나서서 나의 길을 가로막는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그런 마음을 알아주는 듯한 피드백을 만나기라도 한 날에는 겨드랑이가 간질거리면서 날개가 돋아나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하늘 끝까지 닿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지난 토요일이 그런 하루였다. 매주 토요일에는 내부에서 중학생 독서수업을 진행한다. 세계 단편소설을 함께 읽어나가면서 줄거리와 주제를 살펴본 다음, 이해한 내용을 요약해 발표하게 만든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구조화, 맥락화가 필요한데, 우선적으로 말로 설명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말로 설명하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는 무시무시한 말과 함께. 사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나면 글쓰기가 한결 쉽게 느껴진다. 그런 까닭에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방식을 오랫동안 고수해오고 있다. 토론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전문적으로 글쓰기를 가르치거나 다듬는 방식이 아니라 말로 설명하고 글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수업에 참여한 아이들의 경우 몇 년을 함께 한 아이들도 있지만, 올해 처음 참여한 아이들도 있다. 첫날, 그리고 두 번째 날 그 아이들의 의아해하는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근거를 마련하는 일에 시간을 쏟아야 하는데 내용을 장악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거기에 머릿속에 정리된 내용을 자꾸 말로 내뱉게 만드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회차가 늘어나면서 아이들도 조금씩 알아차리는 모습이다. 아이들에게 내가 바라보는 풍경을 전달해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여겨봐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늘 덧붙여준다. 글쓰기에 있어 '잘'을 떠올리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글쓰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잘'이 아니라 '생각'이라는 것을.
소수 정예로 진행하다 보니 시간차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데, 길게는 5분 정도 자유시간이 생겨난다. 그럴 때는 각자 원하는 것을 하도록 허용한다. 그날, 한 아이에게 글쓰기를 검토한 후 자유시간을 주었다. 그 아이는 씩, 한번 나를 향해 웃더니 지우개 똥을 끌어모아 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려니 하면서 아이를 지나쳐 다른 아이의 글을 살펴봐주었다. 두 아이가 완성한 글을 봐주고 자리로 돌아올 때였다. 궁금한 마음에 언뜻 무슨 글자가 보이는 것 같아, 슬글슬금 다가갔다. 그곳에는 짙고 연한 회색빛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THANK"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