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다 보면 ‘글’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표현하고 싶은 생각은 가득한데, 막힌 골목에 들어선 것처럼 사방이 막막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창작의 고통’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창작이 기쁨의 대상이 아니라 고통의 근원이라는 사실만큼 글쟁이에게 큰 슬픔이 있을까. 어디 그뿐일까. 숱한 날을 그 안에서 허둥거렸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고통을 향해 자발적으로 발을 담그는 모습을 두고 어리석다고 해야 할까, 성실하다고 해야 할까, 가끔은 나도 헷갈린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창작의 고통.
무엇보다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세우는 일은 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어떤 일을 하든 막히는 순간이 생겨나고, 도무지 해결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글을 쓰는 것도 다르지 않다. 영감이라는 것도 생겨나지 않고, 정지화면 상태가 지속되는 기분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러면 자책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완성할 수 있겠어?”
“재능도 없는데,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평생 헤매다가 끝나도 괜찮아?”
“저기에 도달할 수는 있을까?”
옮기고 나니, 참으로 낯익은 표현이다. 어느 밤, 어느 시절. 한소쿠리 가득 담아 내 머리 위에 쏟아부었던 말들. 채 마르기도 전에 입안에서 반복했던 말이다. 물론 과정적으로 저런 모습을 마주하는 시기는 생겨난다. 다만 그럴 때 너무 오래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창작의 열정, 글을 쓰고 싶은 열정을 줄이는 것은 물론, 지금껏 이룩한 모든 것들이 시시하고 한심해 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비교는 금물이다’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품의 완성도, 작가의 스타일을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것과 별개로 그의 작품과 나의 작품을, 그의 스타일과 나의 스타일을 비교하는 일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작품은 작가의 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작가의 스타일은 오랜 밤과 낮을 보내면서 구축한 하나의 세계관이다. 그러니까 경험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른 것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애초에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접근하면 ‘창작의 고통’이라는 슬픔을 떨쳐낼 수 있을까.
원론적인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우선 ‘규칙적으로 글을 쓰는 습관’을 지녀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분량을 정해놓는 것도 좋고, 시간을 정해놓는 것도 방법이다. 말이 안 되는 단어의 나열에 불과하더라도, 매일 일정한 양의 글을 쓰는 습관부터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매일 창작의 고통에 노출되고, 그런 상황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이 글에 묻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훈련을 이어 나가면 고통이라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흔한 말로 나중에는 ‘글을 쓰는 게, 원래 그렇지 뭐.’가 된다.
두 번째는 창작의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을 찾거나 사람을 만나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가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무언가를 말해주는 것을 향해 몸을 옮기는 것이다. 공간이라면 머리와 가슴을 포근하게 감싸줄 것이고, 사람이라면 창작의 고통을 끌어안을 이유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렇게도 힘든 일, 가끔은 포기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은’ 마음에 불씨가 되살아날 것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한참 들여다보았더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어쩌면, 어쩌면 우리는 ‘창작’이 아니라 ‘쓰지 않게 되는 것’을 더 두려워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창작의 고통이 싫었던 게 아니라 창작의 고통을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를 염려한 것은 아니냐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창작의 고통’이라는 글자를 앞에 두고 이렇게 열심히 자판을 두드릴 이유가 없을 거라고 말이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