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치면 엄마는 마치 내가 악의를 품고 자기 재산을 훼손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불같이 화를 냈다(p.33)”는 그녀의 얘기에 친정엄마가 떠올랐다. 높은 나무에서 떨어져 발을 접질린 그녀를 향해 “엄마가 대체 몇 번이나 말했어? (p.33)”라고 말했을 때 이유도 모른 채, 친정엄마가 다시 소환되었다. “항상 10퍼센트는 남겨두어라. 네 자신이 언제든 기댈 곳이 있도록. 나도 네 아빠한테 내 맘을 온전히 다 내어주지 않는단다”라는 미셀 엄마의 말에 나의 친정엄마는 10퍼센트를 남겨두었을까, 엄마가 기댄 곳은 무엇이었을까, 몇 번이나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H 마트에서 울다>는 미셀 자우너가 엄마와의 추억, 엄마의 죽음을 마주한 순간부터 심경의 변화, 엄마를 떠나보낸 날의 기억, 엄마에 대한 그리움, 엄마 없이 살아가는 날들에 대한 흔적을 회고록의 형식으로 옮긴 책이다. 거기에 자신이 정체성에 대해 방황했던 날들, 그로 인한 두려움, 고민, 불안까지. 자기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래서일까. 감수성 가득한 작가의 흔적을 쫓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았다. 세상과 부딪쳐 충돌하여 나가떨어진 기분,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삶이 내 편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던 나의 지나온 과거가 수시로 오버랩되어 마치 그녀와 오래된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H 마트에서 울다>는 굉장히 솔직하다. 마치 내면에 어떤 찌꺼기도 남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사람처럼 복잡한 것을 복잡한 대로, 본능적인 것은 본능적인 대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대로, 가장 적절한 단어나 표현을 그려내어 상황이나 감정을 설명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작가에게는 <음식>이 엄마와의 연결고리이며, 엄마를 향한 그리움의 표상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도구였다면, 내게는 아니었다. 알지 못했던 음식을 직접 시도하고, 새로운 음식을 만들고, 그 음식을 가족이나 친구와 공유하는 과정이 삶의 은유적 역할까지 해냈다면 나에게 <음식>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지나치게 길게 레시피를 설명하는 몇 페이지를 가볍게 넘겼다는 고백을 해야 할 것 같다.
엄마의 죽음, 슬픔에서 끝내지 않고, 애도의 시간을 넘어 엄마와 자신과의 관계를 재정의하려는 그녀의 시도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내면의 어느 감정 하나 허투루 보내지 않고, 이름 없이 사라지지 않고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자신의 생(生)을 돕는 모습도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음식이 음악을 이어지고, 음악이 삶으로 나아가는 서사적인 과정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날, 내가 아직 가 보지 않은 길, 그녀로 인해 “마치 나의 미래를, 평생 내 안에 가지고 다닐 고통(p.248)“에 대해 어느 날보다 해가 길었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말했다.
내게 너무도 익숙한 한국말, 내가 평생 들어온 그 다정한 속삭임. 어떤 아픔도 결국은 다 지나갈 거라고 내게 장담하는 말.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나를 위로했다. 엄마의 모성이, 엄마가 느꼈을 테지만 능숙하게 숨겼을 무진장한 공포를 제안해버린 것이다. 엄마는 무슨 일이든 어찌어찌 잘 풀릴 거라고 내게 말해줄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난파선이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담담히 지켜보고 있는 태풍의 눈과도 같았다. _미셀 자우너 <H마트에서 울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
#기록디자이너 #글쓰기 #감성에세이 #윤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