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청소를 했을 뿐인데

by 윤슬작가

다른 곳은 아닌데, 유난히 냉동실 청소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꼭 정리해야 한다는 느낌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애초에 냉동실에 넣을 때부터 유통기간이라는 게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당장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필요할 때 꺼내면 되는 거라는 생각에 ‘가능한 빨리’라는 게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한두 개일 때의 문제이다. 구석구석 조금씩 살림살이가 채워지는 것처럼 냉동실도 조금씩 자리가 채워지는가 싶더니 여백의 미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공간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통기한이 얼어붙은 것처럼 냉동실도 꽁꽁 얼어붙은 것 같다. 그래서일까. 냉동실 문을 열었다가 필요한 것만 꺼내고 서둘러 닫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린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연말이 다가오면서 익숙한 감정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감정으로 시작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생겼다. 어마어마하지는 않더라도 부채감이라고 할만한 것은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주말 아침, 냉동실에 있던 모든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생일날 먹고 남은 케이크 한 조각, 친정엄마가 보내준 버섯 말린 반찬, 어머님이 보내주신 숭늉 가루, 녹두가루, 미숫가루, 거기에 생선, 몇 개 남지 않은 떡국 조각들, 언제 넣어뒀는지도 모르는 송편 뭉치, 제각각의 크기로 남아있는 깨와 곡식들. 나중에 먹으려고 담아둔 국, 그뿐이 아니었다. 여름에 이동할 때 음식 상하지 않게 도움 주는 얼음팩이 13개까지.


어떤 사람은 냉동실을 정리하면서 추억 여행을 떠난다고 하던데, 내게는 반성과 성찰의 시간이었다. 묵언 수행의 시간에 가까웠다. 여기에 있는 것들이 어떻게 왔는지,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또 이대로 계속 두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결과적으로 어떤 모습이 연출되었을까. 여러 생각을 머리를 채우는 시간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의 성격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른들이 챙겨주시면, 다 먹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오는 성격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 정도도 안 먹으면 어떻게 하노?’라는 얘기에 정말 ‘이 정도만’이라고 가져왔는데, 그마저도 넘쳐나고 있으니,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밖으로 나온 것을 구분하여 나눠 먹을 수 있는 것은 나누고, 아직 기한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하나씩 냉동실에 다시 집어넣었다. 비 닐포장을 여러 번 닦아내면서 그동안 소홀히 대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고백하며 앞으로는 무기한 보관하는 게 아니라, 소중한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맛있게 먹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예전에 읽었던 「청소력」이라는 책에 “단지 청소를 했다는 것만으로 말입니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단지 청소했다는 것만으로 자기장의 변화가 생겨난다는 내용이었는데, 내 마음이 딱 그 마음이었다.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주위가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단지 냉동실 청소를 했을 뿐인데 말이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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