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오후, 외부 일정을 위해 사무실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갑자기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반가운 마음에, 그렇지 않아도 집에 한 번 다녀갈 때가 되었다고 전날 남편과 얘기했던 게 기억나 그 이야기를 전했더니 딸이 대답했다.
"아닌데... 오늘은 집에 못 가. 병원 예약이 오늘이라서 잠시 가는 거야. 아마 집에는 다른 날 가야 할 것 같아."
"그래?"
순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실은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은, 익숙한 일상이 되고 있던 터라 다음에는 꼭 얼굴 보여달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 다음 오후 업무를 마무리하고 외부 일정을 위해 집에 주차한 뒤 근처 모임 장소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엄마, 나 병원 진료 끝났어. 지금 버스 기다리고 있어."
"그래? 어디?"
"병원 바로 앞 정류장."
"그래, 엄마 맞은편에서 지금 걸어가고 있는데?"
"그래?"
8차선 도로를 정면에 두고 양쪽에서 서로를 발견한 우리는 연신 손을 흔들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수화기를 귀에서 떼지 않은 채, 서로를 향해 활짝 웃었다.
"나 엄마 봤어? 엄마도 나 봤어?"
"그럼, 엄마도 봤지!"
빨간 신호등은 무심하게 서 있었고, 그 사이를 차들만 바쁘게 오가는 순간이었다.
"병원 진료는 잘 봤어? 아프지 않았고?"
"조금 아팠는데 괜찮았어. 엄마는 어디 가?"
"엄마는 수업 가는 길이지."
"엄마, 지금 오는 버스 다음 거 타면 돼."
"곧 오겠네."
"딸, 조심해서 가. 다음에는 집에서 자고 가."
"응, 엄마도 수업 잘해!"
"그래, 또 보자."
"응."
말을 마치며 전화를 끊은 딸이 버스에 올랐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간 아이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나 역시 양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딸아, 잘 지내고 만나자. 오늘도 무해한 하루 보내.'
8차선 도로 한가운데를 향해 천천히 멀어져가는 버스를 바라보며 혼자 속으로 되뇌었다. 그 순간, 기억 속에 잠들어있던 아주 오래된 장면 하나가 머리에 떠올랐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친정에 들렀다가 대구로 돌아갈 때였다. 차가 없던 터라 늘 대중교통으로 친정인 울산과 대구를 오갔다. 그날도 그런 날 중의 하루였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임신한 몸이었고, 양손에 짐을 들고 가는 딸이 안쓰러웠던 친정엄마는 그날도 버스에 함께 올랐다. 짐을 정리해주고 안전벨트를 매어준 엄마는 아직 버스가 출발하려면 시간이 남았는데도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버스 근처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이제 가도 된다고 몇 번을 말해도 자리에서 꿈쩍하지 않던 엄마는 버스가 출발하자 나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엄마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만 보아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딸, 잘 가. 조심해서 가.'
창문을 통해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함께 손을 흔들었던 그날. 그 기억이 생각나면서 딸과 헤어지고 자리를 이동하는 내내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손을 흔들어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행동 안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 걸까. 대구를 향하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준 친정엄마의 마음이나 딸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나의 마음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그게 뭘까. 모임 장소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조금 정리된 느낌이 들었다. 손을 흔들어준다는 것은 '잘 가라'는 의미를 넘어, '조심해서 가라'는 바람을 넘어, '잘 지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마음이 아닐까.
인생은 어떤 가르침보다 어떤 장면으로 설명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멀어지는 버스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드는 장면을 통해 설명해주기보다 감각적으로 배우기를 원하는 모습이다. 엄마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던 자리에 나로 하여금 서게 만들고, 똑같은 행동을 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인생학교, 내가 가르침대로 제자리를 잘 찾아온 것이기를 희망해본다.
from 윤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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