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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엄마를, 엄마는 아들을

by 윤슬작가

볼링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장비부터 갖추게 될 줄이야. 남편이 취미 삼아 시작한 볼링이 어느새 우리 부부의 일상에 자연스레 자리 잡았다. 나 역시 분위기에 휩쓸려 어느 순간 볼링화, 아대, 그리고 마이 볼까지 손에 넣었다.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인 후에 장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나만의 원칙은 완벽하게 무너진 첫 사례가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그야말로 초보 중의 왕초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재미가 있다. 공이 빨려 들어가듯 레인을 가로지르다 핀 몇 개를 쓰러뜨릴 때면 저절로 어깨춤이 나온다. 반대로 핀이 하나도 쓰러지지 않을 땐 딱 그만큼 기분을 느낀다. 양손으로 머리를 헤집게 되는데, 그 모습을 남편이 보고는 제발 그것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거듭, 거듭 당부한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늦게 저녁을 먹은 우리는 산책을 하려다가 자연스럽게 볼링장으로 향했다. 동네 식자재 마트 옆에 자리한 널찍한 볼링장. 가까운 곳에 이렇게 넓은 볼링장이 있다는 게 그동안 혜택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하여간 기분 좋게 입구에 들어섰고, 저녁 10시를 넘긴 시간이라 볼링장은 한산했다. 귀에 낯익은 익숙한 팝송과 함께 시원하게 공이 구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늘 그렇듯 스텝 연습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앞으로 내딛는 발걸음마다 몸의 리듬을 익혀가는 과정. 말로만 듣던 ‘스텝이 꼬인다’라는 표현을 제대로 실감하는 요즘이다. 내 몸이 마음대로 안 되는 상황,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스텝 밟기가 한창이었다. 그때, 옆 레인에 한 가족이 들어섰다. 아빠, 엄마, 그리고 두 아들. 다정하게 어깨를 맞대고 웃으며 입장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아빠는 작은 체구였다. 아이들보다 키도 작고 몸도 아담했다. 하지만 볼링공을 들어 올리는 손길이 제법 노련해 보였다. 아빠는 조심스레 첫 번째 공을 굴렸다. 공이 핀을 향해 달려가는 그 순간, 아빠는 고개를 돌려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음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완벽한 순간이 만들어졌다. 곧바로 아빠는 다시 핀을 바라보았고, 공은 정확히 가운데를 가르며 스트라이크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섰지만, 그의 표정은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뒤이어 첫째 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보다 훨씬 큰 체격의 소년은 약간 긴장한 듯 공을 잡았다. 엄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들에게로 향했다. 기대와 응원의 기운이 섞인 따뜻한 눈빛,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아들은 과감하게 공을 던졌다. 하지만 공은 왼쪽으로 치우치더니 그대로 미끄러지듯 옆 레인을 따라 빠져나갔다. 그 순간에도 엄마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아들의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변함없는 미소를 보내주고 있었다. 두 번째 공을 던진 아들은 이번에는 여섯 개의 핀을 쓰러뜨렸고, 자리로 돌아오며 엄마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엄마는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말보다 먼저 전해지는 ‘괜찮아! 멋졌어!’라는 응원의 몸짓. 모든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났지만, 그 주변이 온통 환하게 빛나고 있음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아빠는 엄마의 미소로 위로받고, 아들은 엄마의 눈빛 속에서 자신감을 얻고 있었다. 몸짓 하나, 눈빛 하나가 얼마나 큰 말을 대신할 수 있는지 간접적으로 느끼는 시간이었다. 가족이란 그런 존재가 아닐까. 서로의 거울이 되고, 서로의 지지대가 되고, 때로는 서로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관계.


그날 나의 점수는 70점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내내 혼자 기분 좋은 얼굴로 웃으면서 걸어왔다. 볼링장의 조명 아래서 마주했던 그 따뜻한 장면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어떤 결과를 향해 살아가지만, 실은 아주 작고 사소한 순간들이 우리를 지탱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거창한 응원이나 화려한 무대가 아닌, 그저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눈빛 하나, 괜찮다고 말하는 손짓 하나가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랑이 아닐까.


from 윤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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