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하루가 도착했다

by 윤슬작가

김장이 힘든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같이’ 무언가를 해내는 풍경에는 늘 따뜻함이 깃든다. 올해는 친정과 시댁의 김장 날짜가 드물게도 달라 엄마와 함께 김장을 할 수 있겠다 싶어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조카들도 보고, 동생들과 오랜만에 담소도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생기며 결국 김장에 함께하지 못했다. 아쉬움을 전하자, 김장을 마친 일요일 저녁,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 우체국 가서 김장김치 좀 보낸다. 다음 주 김장 전에 맛이나 보면서 지내라.”

괜찮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이미 엄마의 마음은 발송 버튼을 눌러버린 듯했다. 월요일 아침, 일정을 조정해 우체국 택배를 받았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출근하고 싶었다. 박스를 열기 전까지만 해도 그 안에는 김치만 들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개봉하는 순간, 아주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투명 비닐에 차곡차곡 싸여 있는 세 가지 반찬, 그리고 겹겹이 감싸진 김치. 흘러내릴까 봐, 혹시라도 상하면 어쩌나 싶어 몇 번이고 비닐을 겹쳐 묶었을 엄마의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엄마에게 요즘은 집에서 밥을 먹는 시간이 거의 없다고 여러 번 말해왔다. 하지만 엄마는 늘 ‘괜찮다’는 내 말을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어쩌면 믿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택배 박스에서 반찬을 꺼내어 비닐을 한 겹씩 풀 때마다, 그날 엄마의 하루가 자연스레 그려졌다.

아침 일찍 시장에 가서 채소값을 흥정했을 모습,

김장을 막 끝내고도 ‘하나라도 더 넣어야지’ 하며 분주했을 마음,

우리 가족이 맛있게 먹을 모습을 떠올리며 마지막 테이프를 붙였을 순간까지.

그러니까 엄마가 보낸 것은 김장김치가 아니라 ‘엄마의 하루’였다. 엄마의 시간, 엄마의 정성, 엄마의 체력, 그리고 엄마의 사랑이 겹겹이 포개져 상자 안에 담겨 도착한 것이다.


살다 보면, 우리는 늘 ‘특별한 행복’을 찾아 나선다. 더 큰 기쁨, 더 화려한 장면, 더 기억에 남을 무언가를 기대하며 하루를 채운다. 하지만 정작 삶을 단단히 붙잡아주는 것은 그런 거창한 행복이 아니라, 이렇게 조용히 도착하는 하루들인지도 모른다.


현관 앞에 놓인 택배 한 상자처럼, 누군가의 마음이 말없이 도착하는 날처럼, 지나간 계절의 미세한 온도가 문득 되살아나는 순간처럼, 행복은 특별한 곳에 있지 않았다. 이미 곁에서 묵묵히 반복되고, 쌓이고, 익어가는 일상 속에 깃들어 있었다. 김장김치를 냉장고에 넣으며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언젠가 내 손끝에서도 이런 하루가 누군가에게 도착하면 좋겠다고.


누군가가 내가 보낸 상자를 열며,

“아, 이 사람의 하루가 여기 있구나”

하고 미소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엄마의 하루에서 시작된 마음이,

나의 하루로, 또 누군가의 하루로

천천히 이어지길 희망해 본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

#윤슬작가 #윤슬에세이 #기록디자이너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