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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 없다

by 윤슬작가

삶은 정교하게 짜인 오케스트라보다, 예측 불가능한 즉흥 연주에 훨씬 더 가깝다. 때로는 그리스 비극의 장면처럼 지독할 만큼 운명적인 ‘어쩔 수 없음’ 앞에 서게 된다. 실존적 한계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그런 순간엔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의지를 불태워도, 예상치 못한 한 장의 패가 우리를 가볍게 뒤집어버린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오래 공들인 관계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아무리 주먹을 쥐고 발을 동동 굴러도 그 저항이 의미를 잃는 순간. 냉정함은 슬픔이라는 한 단어로도 부족하다.

며칠 전, 둘째가 체육시간에 다치는 일이 있었다. 처음엔 며칠 쉬면 나아지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뜻밖으로 흘러 입원이 필요했고, 기말고사도 병결 처리가 필요해졌다. 아이도, 나도 무언가를 해볼 수 없는 절대적 패배를 마주했다.


이럴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원망할 대상을 찾는다. 누구의 잘못인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묻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 ‘우연한 사고’였다. 책임을 따지거나, 관리를 못했다고 비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저 내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 잠시 몸부림쳤다. 무심하게 벌어진 사건 앞에서 오래간만에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그런데 며칠을 지나오며 뜻밖의 변화가 찾아왔다. ‘어쩔 수 없다’라고 인정하는 순간, 마음이 오히려 차분해진 것이다. 해방감까지는 아니어도, 억울함과 속상함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감정의 소모를 줄이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서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 며칠, 나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일. 그 단순하면서도 본질적인 구분이 삶을 덜 흔들리게 한다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일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무력감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나 그 감정이 우리를 소진시키도록 내버려둘 필요는 없다. 애초에 삶은 완벽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고급 노트가 아니라, 군데군데 밑줄이 그어지고 여백에 낙서가 가득한 낡은 메모장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다짐한다. 어쩔 수 없는 일 앞에서 더는 싸우지 않겠다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남아 있는 에너지를 모아 지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향해 나아가겠다고. 어쩔 수 없는 일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한 조각을 선택하는 힘, 그 힘을 끝까지 믿어볼 생각이다.


from 윤슬작가

#윤슬에세이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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