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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Mar 05. 2022

나의 스웨덴 선생님

하마글방 25기, 글감 : 인간 자명종

"당신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건 누군가가 당신을 깨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인간 자명종에게 고마워합시다." 

- 리베카 솔닛,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23살의 초겨울, 나는 스웨덴에 있었다. 교환학생으로 반년을 머무를 참이었다. 스웨덴에 도착해서 기숙사에 짐을 풀고 청소를 했고, 다음 날부터는 동네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녔다. 편의점은 여기에, 공원은 저기에, 그리고 제일 큰 마트는 이 방향, 학교는 반대 방향. 마을을 한 바퀴 걸으면서 예쁜 카페와 잡화점, 서점 등에 들어가서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나는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는데, 단 한 명도 나에게 먼저 영어로 말을 걸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카페 종업원, 서점 주인, 마트 직원들 모두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스웨덴어로 말을 걸었다. 왜? 나는 누가 봐도 아시안인데.


그때 머리를   맞은  같이 깨달았다그들은 인종으로 국적을 가늠하지 않았던 것이다그들에게 인종차별이란타인의 외형만을 보고 국적을 가늠해 영어나 기타 언어를 사용하는 것부터 포함되는 개념이었다그러자 내가 한국에서 다른 인종의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남발했던 영어가 떠올라 부끄러웠다그건 참으로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 충격에 한동안 정신이 멍했다.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인종차별의 개념이 훨씬 확장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얼얼한 정신으로 개강 첫 날을 맞이했다.



개강 첫 수업은 ‘기초 스웨덴어’였다. 백발에 허리가 조금 굽어 느릿느릿 걷는, 70대 정도로 보이는 인자한 인상의 할아버지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학생들에게 밝게 인사를 해주었고 느리지만 컴퓨터도 곧잘 사용하는 세련된 멋쟁이 선생님이었다.

그는 자신을 Kjhell [쉘]이라 소개했고, 학생들은 모두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도 나를 이름으로 부르고 나도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적응하기 힘든 묘한 상황은 이상한 만족감과 평형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 평형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웨덴어 수업에는 동양인이 많지 않았고 대부분이 미국인이거나 유럽인이었다. 그러므로 이미 영어가 모국어인 친구들과 스웨덴어와 비슷한 언어를 구사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영어로 스웨덴어를 배우느라 고군분투해야 했다. 나를 포함한 몇 명의 동양인 친구들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나는 꽤나 언어에 자신이 있었는데 하루하루 그 자신감은 반토막씩 깎여나갔다.


수업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내용도 어려워지자 수업시간 내내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수업을 따라가지 못한다니, 이 문장을 이해하지 못한다니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그러다 한 날은 Kjhell이 스웨덴어 텍스트를 한 단락 읽어주더니 갑자기 내게 영어로 번역해보라고 했다. 나는 당황하다가 결국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고, 그 말이 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단전에서 올라오는 분노와 수치심을 느꼈다. 왜 Kjhell은 미흡한 제2 외국어로 제3 외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을 고려해주지 않는 거지? 그리고 미국인 친구가 그 문장을 대신 번역하는 걸 보면서 수치심은 극에 달했다.

분노가 치밀 때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에 나는 당장 손을 들어 Kjhell을 불러 울분을 토했다. 어떻게 이렇게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따라가기 버거운지 등의 말을 쏟아냈던 것 같다. 그리고 불만을 토로하기가 무섭게 내가 쏟아낸 무례한 말에 후회가 밀려왔다. 다행히 Kjhell은 미안하다고 말한 후에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수업을 진행해주었다. 그리고 수업 틈틈이 동양인 학생들 곁에 와서 내용을 더 꼼꼼히 살펴주었다. 그런 그의 배려에 다시 마음이 누그러지고 수업 내용을 따라갈 수 있게 되자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가방을 싸고 있는데 Kjhell이 내게 와서 잠시 얘기를 하자고 했다. 아까 Kjhell에게 너무 무례하게 말을 막 쏟아낸 걸 기억하며 아차 했다. 머릿속에서 영어 단어를 조합하며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Kjhell이 내게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은비, 네 말은 틀리지 않았단다. 내가 그렇게 수업을 빨리 나갔으면 안 되었는데 정말 미안하구나. 내게 먼저 말을 해주어서 고마워. 앞으로 또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꼭 말해주렴.”하고 말했다.


나는 얼이 빠진 채로 멍하니 서있다가 이해해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 순간은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동양인인 나를 고려해 고개를 숙였다는 것도, 할아버지 교수님이 어린 학생에게 사과를 했다는 것도. Kjhell은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았고 나의 의견을 존중했다. 어쩌면 그건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배려와 예의에 기반한 행동이었지만 한국에서는 겪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너무 생경했다. 나는 그때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는 걸 예감했다.


이후 Kjhell이 마을의 가장 핫한 클럽에서 디제잉을 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리 크게 놀라지 않았다. 마냥 기쁘고 재밌었다. 그가 디제잉하는 옛날 스웨덴 노래를 들으면서, 그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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