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오늘
밤 비행기를 탄다.
오늘의 비행은 나와 아이들을 새로운 의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 예정이다. 그곳은 너무나 낯설지만, 아마도 좋은 곳일 거라고 나는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정말 좋은 곳일 거라고, 꽤 괜찮은 곳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다시 마음을 고쳐 먹기로 한다. 좋지 않아도 괜찮다, 좋지 않아도 우리는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에게는 각각 20kg짜리 캐리어를 맡겼다. 둘째 아이의 키가 캐리어보다 조금 큰 정도이지만 그래도 감당해 내기를 바라본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의 캐리어는 아이들이 짊어져야 하는 하나의 의무이기도 하다. 인생에서 어떻게든 끌고 가야만 하는 자신의 의무. 아이들은 그러한 의무를 말없이 받아들인다. 캐리어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소중하게 껴안기도 하면서.
‘인간의 행복은 자유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의무 속에 있다’는 어느 책의 한 구절이 생각이 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캐리어를 끌고 다닌다. 아무리 무거운 캐리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캐리어를 말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행복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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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탄 비행기는 14시간 동안 하늘을 난다. 그토록 오랫동안 내 두 다리가 공중에 떠 있는 것이 나는 그저 신기할 뿐이다.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린 수많은 기술을 아직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해할 수 없는 그 비행 속에서 나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동안 나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 누군가 때문에 괴로웠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바라보지 않는 누군가 때문에 외로웠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진흙 속에서 버둥거리는 동시에 가질 수 없는 무엇을 향해 손을 뻗는, 그런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나는 잘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러한 진흙탕 속에서 이제는 빠져나왔다. 나 혼자서 바라보던 일방적이고 애달픈 애정도 이제는 벗어던졌다.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 때문일까. 지상에서 물리적으로 떨어져 나와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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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오랜 시간 하늘을 날았다. 하늘은 노란 햇빛으로 가득 물들기도 하고, 붉은 노을이 되어 타오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내 밤이 되었다. 지친 사람들은 하나둘씩 잠에 빠져들었다. 아이들은 작은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고개를 쭉 빼고 앉아 있다. 우리는 잠시 화면을 끄기로 했다. 텅 비어버린 화면을 응시하던 아이들 역시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으로 가득한 비행기 속에서 나는 홀로 까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은 비행기를 품에 안고 우리와 함께 날고 있었다. 그것이 밤하늘의 의무였다. 밤하늘은 오랜 시간 비행기와 함께 날다가 목적지에 가까워지면 우리를 토해낼 것이다. 그것 역시 밤하늘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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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로 가득한 비행. 나는 비행을 하며 잠시 자유로워졌다고 기뻐하고 있으나, 사실 결코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다. 오래된 의무와 새로운 의무의 경계 사이에 떠있을 뿐.
이제 새로운 의무 속으로 조금씩 나는 들어간다. 그 의무가 아무리 무거운 100kg짜리 캐리어라고 할지라도, 새까맣게 안 보이는 어둠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수용할 자신이 있다. 그것이 나의 의무이고,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의 행복이 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