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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보다 깊은 한잔의 커피

커피 한잔에 담긴 배려


사랑과 배려는 어디에서 드러나는 걸까?


커피는 사랑이다. 적어도 이 사진 속에 있는 두 잔의 커피는 그러하다. 보기엔 특별한 배경도 없고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인 '두 잔의 커피' 사진일 뿐이다. 컵이 화려하긴 하지만 커피의 거품이 묻어 지저분해 보이기도 한다. 출렁거리며 옮겨진 듯한 이 커피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우리 부부는 ‘여행은 온 가족이 함께 해야 한다’ 고 생각했기에 부부만의 여행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다가 온전히 한 달을 쉴 수 있는 휴가가 생겼고 멀리 여행을 가고 싶었다. 온 가족이 가기엔 시간도 맞지 않았고 아이들도 어느 정도 성장해서 부부만의 여행을 가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반대할 줄 알았던 남편이 순순히 동의해서 떠나게 된 우리 부부만의 첫 유럽여행이었다.


이 여행은 평소 아이들에게 향했던 우리의 모든 관심을 서로에게만 집중하는 계기가 되었고,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평소에 눈에 들어오지 않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하고 미처 몰랐던 성격과 취향을 알아가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우리 부부는 아침을 커피로 대신하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여행을 가도 믹스커피를 꼭 챙겨간다. 커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이탈리아에 와서 믹스커피를 고집한다는 것은 아무리 루틴이어도 문화의 부적응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여행을 하는 동안은 이 나라의 문화를 충분히 느껴보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남편이 읽은 걸까? 아침마다 믹스커피를 타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이번만큼은 다른 커피를 마시게 해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날은 일정이 빡빡해서인지 아침에 쉽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남편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양손에 들고 있던 커피 중 하나를 내밀며 나를 깨운다. 간신히 눈을 뜨고 화려한 무늬의 잔을 받아 드는 순간, 깊고 진한 향이 코 끝에 스며들었다. 신선함을 보여주는 크레마에 기분이 좋아졌다. 얼른 일어나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뭔가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꼭 무슨 미션이라도 성공한 듯한 얼굴이다. 나를 위한 작은 이벤트였다면, 분명 성공이었다.


손 안에서 작은 커피 잔을 굴리며 여러 가지 궁금증이 떠올랐다. 어떻게 이렇게 예쁜 잔에 담아 올 수 있었을까? 넓은 호텔 안에서 어디서부터 들고 온 걸까? 들고 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쓰이지 않았을까? 이 커피가 내 손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더욱 궁금해졌다.


"이걸 어디서 가져온 거야?"


남편은 카페가 문을 열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직원이 들어가는 걸 보고 커피를 마실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단다. 아직 영업 전이라 판매는 어렵지만, 직접 뽑아갈 수는 있다고 해서 직접 뽑아 왔다고 했다. 투숙객에게 이렇게까지 허용하는 호텔에 감탄하면서도,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남편의 노력 또한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평소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일이 없는' 남편답지만, 나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을 해낸 게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남편이 건넨 "신선한 모닝커피를 마시게 해주고 싶었어"라는 한마디에서, 그의 이른 아침 여정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잠이 덜 깬 채 조용히 문을 나섰을 모습, 카페 앞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두리번거렸을 모습,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을 모습까지. 그 모든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남편이 걸어온 길을 상상하며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잔 가장자리에 남은 크레마를 바라보니, 식기 전에 마시게 하려고 부지런히 걸었을 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마시고 있는 이 커피는 그냥 카페에서 주문해 받아 든 커피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커피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걸어, 조심스럽게 내게로 오기까지—커피의 맛을 떠나 그 과정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커피 한 잔이, 남편의 작은 모험 덕분에 특별해졌다.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생생히 떠오르는 그 모습이, 아직 식지 않은 커피의 온기처럼 따뜻하게 가슴에 남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감동을 남편에게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가끔은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읽고 행동하는 것이 부부 사이의 특별한 언어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우리 부부는 여전히 서툴지만, 서로를 배려하며 함께 배워가고 있다. 때로는 말보다 작은 행동이 더 깊은 마음을 전한다. 그날 아침 남편이 건넨 커피 한 잔처럼, 사소한 순간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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