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 아니라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것
글쓰기를 되돌리는 사유
<기록이 아니라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것>
[기록의 시대]
우리는 기록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사진을 남기고
메모를 남기고
글을 남긴다.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에 갔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든 것이 기록된다.
그래서 그 기록은 점점 많아진다.
그러나 기록이 많아질수록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기록들은
정말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기록의 한계]
기록은 사건을 남긴다.
어떤 날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보존한다.
그래서 기록은
시간을 보관하는 장치가 된다.
그러나 기록은
시간을 붙잡을 수는 있어도
사유를 대신할 수는 없다.
기록은 사건을 설명하지만
사유는 세계를 이해한다.
[사유의 글]
사유의 글은 기록과 다르다.
사유의 글은 사건을 나열하지 않는다.
대신
그 사람이 세계를 바라본 방식,
그 사유의 결을 남긴다.
그래서 어떤 글은 시대가 바뀌어도 읽힌다.
사유가 담긴 문장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글쓰기를 되돌리는 사유]
그래서 글쓰기를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기록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글쓰기는
자신의 사유가 세계와 부딪히며 남긴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그 흔적이
한 문장이 되고
한 문장이 축적되면
한 사람의 사유가 된다.
그리고 그 사유가 축적될 때
비로소 한 사람의 글은
기록을 넘어
문명의 사유로 남는다.
[사유문명론 — 과거제도와 사유의 시험]
조선의 과거제도는 단순한 시험이 아니었다.
임금은 책문(策問)을 통해
나라의 문제를 물었다.
가뭄이 들면
정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백성이 가난해지면
국가는 무엇을 먼저 바꾸어야 하는가.
선비들은 이 질문에
정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경전과 역사,
그리고 현실을 연결해
자신의 판단을 글로 제출했다.
그래서 그 글은
지식을 나열한 답안지가 아니라
한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드러내는
사유의 문장이었다.
조선의 과거시험은
정답을 맞히는 시험이 아니라
사유를 드러내는 시험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지식을 보여주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문장으로 증명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과거의 글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사유가
세상과 부딪히며 남긴
사유의 흔적이다.
* Harold Budd & Brian Eno
<First L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