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문명론 38편 - 사유는 어떻게 흐름을 견디는가

순환하는 구조, 무의식의 강,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사유

by 사유의 무지랭이

* 사유의 흐름을

사람들은 종종 진보라고 착각한다.


앞으로 나아가고,

위로 상승하고,

이전보다 더 정교해지는 것.


그러나 사유는

계단을 오르지 않는다.


사유는

쌓이지 않고,

축적되지 않으며,

완성되지 않는다.


사유는

강처럼 흐른다.


강은 목적지를 갖지 않는다.

강은 도착하지 않는다.


강은 그저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

파인 곳으로 모이며,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강에게는

전진도,

후퇴도 없다.


오직

흐름만 있다.


사유도 그렇다.


[흐름은 직선이 아니라 순환이다.]


『피네간의 경야』의 첫 단어는

대문자가 아닌 소문자로 시작된다.


riverrun.


이 단어는

출발이 아니다.

선언도 아니다.


이미 흘러오고 있던 흐름의

한 단면일 뿐이다.


사유 역시

항상 그 지점에서만 시작된다.


사유에는

기점이 없다.

원점도 없다.


사유는 언제나

이미 흐르고 있던 것의

중간에서

붙잡히는 순간일 뿐이다.


그래서 사유의 끝은

결론이 아니라

다음 시작의 조건이 된다.


사유는

닫히지 않는다.


[사유는 ‘앞으로’가 아니라 ‘다시’다.]


사회는 묻는다.


다음은 무엇인가.

어디로 가는가.

얼마나 더 갈 수 있는가.


사유는

그 질문을 반복하지 않는다.


사유는 묻는다.


무엇이 다시 돌아오는가.

무엇이 계속 나를 붙잡는가.


되돌아오는 질문,

사라지지 않는 문장,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고개를 드는 생각.


사유의 깊이는

새로움의 양이 아니라

되돌아오는 횟수에서 생긴다.


사유는

진보하지 않는다.

사유는

되풀이된다.


[사유는 무의식의 강에서 태어난다.]


의식은

문장을 만들고,

논리를 세우고,

설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유는

의식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사유는

무의식의 강에서

먼저 움직인다.


『율리시스』가

의식의 흐름이었다면,

『피네간의 경야』는

무의식 그 자체의 흐름이다.


그 강에서는

시간이 겹치고,

의미가 융합되며,

논리는 해체된다.


사유는

정리된 상태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아직 언어가 되지 않은 상태,

아직 설명되지 않은 상태,

아직 의미가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유는 먼저 흐른다.


[언어는 고정되는 순간 사유를 죽인다.]


언어를 정의하는 순간,

사유는 멈춘다.


이해되는 순간,

사유는 닫힌다.


그래서 사유의 언어는

불편하고,

난해하고,

끝내 읽히지 않는 상태로 남는다.


이것은 실패가 아니다.

사유가 아직 흐르고 있다는 증거다.


물은

형태를 갖는 순간

그릇에 갇힌다.


사유도

정의되는 순간

사고의 용기가 아니라

지식의 대상이 된다.


[흐름에 올라타는 순간 사유는 흡수된다.]


사유가

유행을 설명하고,

시대를 요약하고,

속도에 적응하는 순간,


그 사유는

이미 흐름에 흡수된 상태다.


사유는

흐름을 타지 않는다.

사유는

흐름을 이용하지 않는다.


사유는

흐름을 견딘다.


견딘다는 것은

거부가 아니다.

반대도 아니다.


따르지 않되

싸우지 않고,

속하지 않되

이탈하지 않는 태도다.


사유는

항상

중간에 남아 있는 힘이다.


[사유는 반드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밖으로 나간 사유는

사회와 충돌하고,

타인의 언어에 섞이고,

의미를 잃기도 한다.


그러나

사유가 진짜라면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


돌아와서

다시 질문이 되고,

다시 침묵이 되고,

다시 쓰이지 않는 문장이 된다.


이 순환이 끊기는 순간,

사유는

소비된다.


소비된 사유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끝은 언제나 시작과 연결된다.]


『피네간의 경야』에서

마지막 문장은

첫 문장의 나머지다.


끝이

앞을 완성한다.

뒤가

앞을 부른다.


사유문명론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각 편은

독립되어 있지만,

항상

다시 앞을 향해 열려 있다.


사유는

닫히지 않는다.

사유는

순환한다.


[결론]


사유는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아니다.


사유는

되돌아오며

점점 깊어지는 힘이다.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사유는

그 흐름 속에서

자기 자리를 잃지 않는다.


사유란

흐름 속에서도

자기를 다시 불러오는 구조다.


이어 <사유문명론 39편 - 사유는 전달되지 않고 스며든다 -의미가 이동하는 방식>로 이어집니다.


* 인도 힌두교에 베다(Veda)는 읽히는 텍스트가 아니다

리듬으로 외워지는 구조다.

베다는

의미를 이해해서 암기하지 않는다. 소리를 몸에 새긴다.

그래서 베다의 전달 경로는 눈 이해가 아니라

귀 호흡 반복이다.


뜻을 모를수록

암송은 더 정확해진다.

의미는 리듬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베다는

설명하지 않는다. 정의하지 않는다. 가르치지 않는다.

같은 소리로 계속 돌아오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베다는 지식이 아니라 사유가 살아남는 환경이다.

읽는 자보다 오래 외운 자에게 사유는 스며든다.

마찬가지로 위에 언급한 피네간의 경야도 이해하려 달려들면 그 속 수렁에 빠져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

이 또한 의미를 잠시 내려놓고 리듬으로 읽어 나갈 때 그 의미 보다 그 속에 남아 있는 본래 잔존물을 얻어 낼 수 있다. 이렇게 사유를 철학적 논증적으로 또는 기존의 철학의 대가들의 계보에서 찾아 매달릴 때 그 사유는 또다시 수렁에 빠진다. 답은 멈춤에서 시작되는 사유를 자신의 리듬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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